남편과 나는 동갑이고 우린 스물다섯에 만나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둘 다 결혼이 뭔지, 가정을 이룬다는 게 뭔지도 모른 채 결혼을 했던 것 같다. 또 둘 다 집으로부터 빨리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었나 싶기도 하다. 남편 집이나 우리 집이나 뭐 그렇게 사랑이 넘치거나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다. 둘에게 집은 마냥 편한 곳만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 결혼을 조금 더 앞당기지 않았을까도 싶다. 남편은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우린 둘 다 결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혼은 그저 부모님 곁을 떠나 다른 사람과 살며 그들만의 공간과 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랑까지 없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달랑 사랑 하나만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사랑 하나면 뭐든 다 될 거라는 막연하고도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으니까. 이래서 너무 이른 나이에 혹은 철이 없을 때 결혼을 하면 안 된다는 거다. 지금에 와서 어쩔 수도 없지만.
우린 결혼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어쨌든 잘살아보자고 했다. 잘살아보자는 말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화목하게 알콩달콩’이란 의미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면서 정작 화목하게 알콩달콩하며 사는 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걸까에 대한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단순히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나중에 얼마나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건지도 모른 채 말이다.
우린 그야말로 모든 걸 함께했다. 쉬는 것도, 여행도, 취미도. 심지어 직장 얘기도 모두 공유했다. 나중에는 남편 회사 사람이 마치 우리 회사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 이부장? 그 사람이 또 왜?” 하는 식이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런 삶이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특별히 불만도 없었고.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많은 게 달라졌다. 잠깐의 시간도 내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회사는 회사대로 집은 집대로 또 아이는 아이대로 어디 하나 소홀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점점 ‘나 좀 쉬자’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럴 때 남편은 눈치도 없이 좀 쉬자며 다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고 했다. 그럼 난 또 주섬주섬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야 했다. 분명 쉬러 나갔다 왔는데 더 지치는 이 오묘한 상황은 아이가 다 자라 엄마 아빠보다 친구를 더 찾을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아이가 친구를 더 찾게 되자 남편은 뭔가 허전해하는 듯했지만 난 이제 드디어 자유가 오는구나 싶어 내심 반겼다. 그런데 웬걸! 아직 자유는 찾아오지 않았다. 남편이 남아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가족’이란 말을 앞세워 뭐든 함께하길 원했다. 집 앞 산책을 나가도, 운동을 가도 꼭 함께하길 원했다. 마치 그게 무슨 법이라도 되는 양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걸로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가족은 늘 함께하는 거란 막연한 신념 혹은 막연한 그림 같은 게 머릿속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난 좀 집에서 쉴게, 라고 하면 같이 좀 걸으면서 쉬지 왜 그러냐며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나 역시 그냥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하면 왠지 안 될 것만 같아 이런저런 핑계를 댔고 남편은 그런 내가 더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우린 서로에게 불만이 쌓여갔고 마음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이 멀어진 게 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많은 것들도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이거라는 거다. 어쩌면 이게 다른 모든 불만을 증폭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다른 모든 불만의 씨앗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함께하는 행복은 어느덧 구속감으로 느껴졌고 이 구속감이 바닥에 깔려 있는 한은 뭘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난 점점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발 좀 각자의 삶을 살자고. 제발 좀 그만 떨어지자고. 솔직히 각자의 삶이란 말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었다. 한 가정 내에서의 각자의 삶과 각각 따로따로의 삶.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었다. 지금보다 편해지기만 한다면. 남편은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게 가족이냐며 그럼 뭐하러 같이 사냐며 역시 또 가족을 들먹이며 동의하지 못했다. 난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론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같이 살지 말든가’ 진심이었다. 더 나중에는 난 이 말을 입 밖으로 내기도 했다. 그것도 아주 자주. 뭐든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은 쉬운 법이다.
‘함께’에 대한 나의 저항이 생각보다 커지고 생각보다 계속되자 남편은 지쳐서인지 납득을 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양보(혹은 포기)를 하기 시작했다. 운동도 혼자 하기 시작했고, 산책도 혼자 하기 시작했고, 등산도 혼자 가기 시작했다. 가끔 “나 산에 갈 건데 같이 갈래?”라고 묻긴 하지만 이내 “아, 아니다”하고 바로 알아서 접는다. 난 다른 대답 대신 잘 다녀오라는 짧은 답을 건넨다. 이젠 여행도 혼자 가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내가 먼저 여행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먼저 여행 가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가끔씩 나 어디 갈까 하는데 생각 있으면 같이 가고, 라고는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는다. 나 역시 남편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전처럼 이런 공부도 좀 하고 이런 사람은 득 될 게 없으니 만나지 마란 잔소리나, 반대로 이런 사람은 좀 친해두면 좋지 않아? 같은 참견은 하지 않는다. 남편이 먼저 내게 조언을 구할 때까지는. 조언을 구하면 말이 좀 길어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각자의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서로가 원하면 같이 여행도 가고, 근교로 드라이브도 가고, 또 상대방이 원하면 서로의 삶에도 잠깐씩 참견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했을 때다. 대신 참견이나 조언을 사양한 만큼 내가 하는 일을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은 커졌다. 그래도 난 지금의 삶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