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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탈 Mar 22. 2024

포그 머신과 햇살

 올해, 아니 어쩌면 15년여 전쯤 모범생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을 때부터 그동안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자면 '브레인 포그'가 아닐까 싶다.


 이 단어를 중요한 단어로 생각하게 된 건 아마도 '꾸준히 운동하고 식단 정비하기'의 나비 효과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피드 탐닉에서 시작해 쇼츠와 릴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자극을 쫓는, 아니 쫓았다기보다는 길들여진 스스로를 어느 날 문득 바라보게 되었다. 길들여진 습관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휴대폰 바탕 화면에 터치 단 두 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그리고 티빙과 넷플릭스 같은 OTT, 또 웹툰의 바로 가기를 삭제하고 스스로 최대한 보지 말자는 의식을 하니 생각보다 쉽게 끊어낼 수 있었다. 이다지도 쉽게. 단지 휴대폰을 열어 잠금을 해제하고 나오는 화면에서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툭, 툭 눌러 열던 습관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콘텐츠 홍수를 벗어났다고 바로 시간의 우주 속에서 멍하게 명상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뭔가 이 빈 시간의 갈증을 채워줄 우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흔히 말하는 좋은 습관인 독서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회사 지원으로 신청만 해두고 들어가는 것은 손에 꼽았던 밀리의 서재 앱에 접속해서 무슨 책을 봐야 하나 하고 보다가 눈에 띈 책의 제목이 바로 <브레인 포그>였다.


'브레인 포그'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딱 나네?라는 생각이 들어 끌렸던 것 같다.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한 치 앞만을 볼 수 있는 안개로 가득 찬 느낌이었고, 지금은 그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중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내 머릿속은 안개로 점차 차오르게 된 것일까? 지난날의 행적을 짧은 시간이나마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마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자각하기 시작했던 고2~3 시절이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이 안개라는 것이 사실은 사춘기의 연장선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말하는 그 방황을 참으로 오랜 시간 꾸역꾸역 끝내지 못하고 껴안고 돌고 돌며 걸어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단상은 사실 이런 구질 구질한 얘기를 하려던 것보다는 그동안 내 안의 안개를 만든 포그 머신들엔 어떤 것들이 있었는 지를 떠올리며 시작되었다. 고3 시절엔 아마도 미니게임천국과 같은 폰게임이었던 것 같고, 학부 1년 시절엔 메이플 스토리가, 그 이후엔 테트리스나 카트라이더 같은 아케이드 게임들이 그 역할을 했겠고, 대학원 시절 이후로는 오버워치가 그랬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시종일관 함께 해온 웹툰, 각종 예능 프로그램, 최근에는 유튜브와 릴스와 같은 숏폼 콘텐츠가 내 삶의 포그 머신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실은 그 포그 머신들은 죄가 없다. 그 머신을 들여온 것도 나이고, 누군가에겐 삶을 촉촉하게 만들어주는 가습기로 쓰였을 수도 있는 것을 스스로 안개 만드는 머신으로 쓴 것이 문제겠지.

 반면에 그동안의 방황길에서 안개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 그 안개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있었고, 그 덕에 한 치 앞만을 보며 살다가도 한 번씩 푸른 하늘을 보며 살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가족과 친구들은 늘 따뜻한 햇살이었던 것 같고, 와중에 강렬한 햇살은 때때로 찾아왔던 집중력이 주는 몰입에 대한 경험, 그리고 인생의 짝이 된 아내, 새로운 삶에 대한 동력과 좋은 습관을 들일 수밖에 없게 해 준 아이의 탄생과 육아라는 과제가 그렇다. 그리고 올해 들어 가장 잘한 습관인 꾸준한 운동은 가족과 친구들이 주는 간접적인 햇살보다 더 강력한 스스로 만들어내는 직접적인 햇살이 되어준 것 같다. 운동으로부터 체력이 생기고, 지속 가능한 건강한 식단에 대한 정착으로부터 몸이 변화하면서 자존감도 점차 높아졌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강력한 포그 머신인 미디어들을 멀리 치워두고, 독서와 생산적인 활동들로 그 자리를 채우니 비로소 하늘이 개고 맑아진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의 안개만 마셔가며 살다가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이 잠깐의 맑은 풍경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든다. 너무 맑고 쾌청해서 사실은 내가 조울증을 앓게 돼버린 것이고, 지금은 조증인 상태이고, 갑자기 다시 울증에 빠지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든다. 그래서 더욱 이 좋은 날씨를 유지하기 위해서 꾸준히 운동도 하고 식단도 지속 가능하도록 건강하게 가져가고 또 소중한 사람들과의 연결을 강화해보려고 한다. 세상의 수많은 포그 머신들이 계속하여 나에게 안개를 만들겠지만, 그것보다 더 강력한 빛을 만드는 햇살을 키워서 대체로 맑은 정신과 마음을 가져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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