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호수마을 인터라켄 (Interlaken)
사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여행기다. 기억의 왜곡이 있을 터이다. 시간이 꽤 지나고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려웠던 일도 추억으로 미화되곤 하니까. 그렇지만 또한 얼마간 소화가 된 경험들을 기록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터이다. 그런 핑계로 지난 추억들을 다시 끄집어 내 본다.
오래전의 이야기라 정확지는 않지만, 아마도 뇌과학자 김경빈 교수의 어느 강연이었던 것 같다. 한국인의 어떤 특징에 대한 농을 들었다.
한국사람들이 단체여행으로 유럽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었을 때였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서둘러 가방을 메고, 신을 신고 버스를 타려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의아한 얼굴을 한 유럽인들이 질문을 하더란다.
"얘들아, 너희들 휴가 온 거 맞지?"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너희는 왜 휴식을 마치 일을 하듯이 전투적으로 하니? 지금 여섯 시잖아!"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만치 부지런한 민족이 없다. 한강의 기적이 어디 그저 이루어진 것일까? 부지런하고 치열하고 열정이 가득하다. 물론 해석 여하에 따라 이는 귀한 장점이 되기도 하고, 지독한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하겠다. 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해 두더라도 우리네 민족성이 그러함을 숨길 수 없다. 낭중지추다.
여담으로 '민족성'에 대해 사족 하면, 독일의 이민교육학자 폴 매체릴(Paul Mecheril)은 국가성이나 민족성은 사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이라고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민족성이나 국가성의 큰 줄기 자체를 부정하긴 어렵다 싶다. 그의 의견을 첨언하면, 국가성이나 민족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으로 봄이 적절할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민족들의 특성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국가의 양상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말이 삼천포로 빠졌다. 우리 가족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새벽 여섯 시부터 우리 역시 부산하게 움직였다. 한국인 특유의 짧은 휴가 기간과 스위스의 미친 물가로 인해 스위스 체류를 원하는 만큼 넉넉히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자연을 두루 살펴보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짧은 기간에 다양한 곳을 방문해야 하는 소위 연예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므로 어른부터 아이까지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그 와중에 어머님께서는 다른 가족들이 잠을 청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기상하셨다. 집에서 가지고 온 밥솥으로 찰진 밥을 짓고, 먹기 좋은 크기로 김밥을 만들었다.
이번에 여행할 곳은 인터라켄(Interlaken)이다. 아내가 가고 싶다고 결정한 곳인데, 참고로 아내는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었다. 사실 인터라켄은 한국인들에게는 드라마 촬영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치 그 옛날(?)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의 흥행으로 많은 일본인들의 남이섬 관광이 인기 있었던 것과 비슷하게 유명하다.
인터라켄을 독일어로 풀면 사이에 있다는 뜻의 Inter와 호수(들)이라는 뜻의 Laken이 합쳐져, '호수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위의 지도를 참고해서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왼편, 서쪽의 툰 호수(Thun)와 오른쪽 동편의 브리엔츠(Brienz) 호수 사이의 작은 마을이 바로 인터라켄(Interlaken)이다.
우리들은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하루를 시작한 터라 언제가 최적의 출발 시각일지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기다림은 그저 지루할 따름이었다. 날이 조금 밝아 오기 시작할 즈음 출발했다. 우리 숙소가 있던 라우터 브루넨(Lauterbrunnen)의 하늘은 연한 회색의 구름이 가득했고 이따금 보슬비가 내리기도 했다. 구름 뒤에 숨은 빛을 쫓아가자니 괜스레 걱정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일기 예보를 확인했을 때 우리가 인터라켄에 도착할 예정 시간 즈음에는 날이 제법 갤 것이라 했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차로 달렸다.
독일에서는 터널을 자주 보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산악지역이다 보니 터널이 많은 편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제법 반가운 풍경이었다. 터널을 지나칠 때마다 맑은 날씨를 기대했는데 여전히 구름에 싸인 하늘은 어두운 편이었고, 누구의 마음이랑 조마조마하든지 말든지, 무심한 하늘은 이따금씩 여린 빗줄기를 뱉어냈다.
"제가 어떤 유튜브를 봤는데요. 그 사람은 날이 안 좋아서 호수 주변 산책만 했는데도 신선하고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날씨가 이런 것이 내 잘못도 아니건만. 한국에서 온 가족들이 실망할까 괜스레 몇 마디 말을 슬쩍슬쩍 흘렸다.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 맑은 날씨를 기대하지만, 혹시, 만약이란 항상 있는 법이니까. 제법 높은 고지에 있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첫 번째 목적지인 브리엔츠 호수에 거의 다다랐다. 다행히 하늘은 슬쩍 푸른 속살을 드러내주었지만, 이젠 호수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호수 위로 옅게 올라오는 안개가 서로 엉켜 들어 모든 풍경을 하얗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너른 마음으로 이런 경관을 보면 '강호연파'의 절경이라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당시 나는 마음이 졸렸던 모양이다.
'이런, 너무 일찍 출발한 것일까? 분명 날이 갠다고 했는데.'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어지만, 지루함을 견디고 숙소에 좀 더 머물걸 그랬다는 생각이 머릴 맴돌았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호수 근처까지 내려가기 시작하니 다행히도 호수의 윤곽이 조금씩 눈에 드러났다. 멀리서 볼 때는 성긴 안개가 겹겹이 채워져 몽땅 하얗게 호수를 가렸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솜을 하나씩 뜯어내듯이 듬성듬성 호수를 내비치는 틈이 생긴 것이다. 내심 안도하며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차권을 발권받아 앞 유리 안에다 넣어두고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마을 초입으로 내려갔다. 그 짧은 잠깐을 시간 동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모인 구름을 흩어버리고, 그 사이로 햇빛이 멀리 산봉우리를 비추었다. 정말 놀랍게도 해가 비치기 시작하자 그 따뜻함에 몸 둘 바를 찾지 못해서일까, 솜사탕이 녹듯이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처음의 하얀 풍경은 거짓말처럼 설산과 푸른 초원, 갈색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브리엔츠 호수마을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와! 우리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요! 이렇게 멋진 광경을 놓칠 뻔했네요!"
마을을 감싸던 안개가 걷힌 호수마을은 그보다 더 잔잔한 고요함이 감싸고 있었다. 오랜만의 해외여행, 그것도 많은 한국인들이 꿈꾸던 스위스로의 여행이라 꽤나 들뜬 마음이었었는데, 호수마을을 바라보자 어는 정도 함께 차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을은 한적했다. 한가하고 고요했다. 마을에 들어선 이는 우리가 전부였다. 이리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스위스 사람들은 아마도 없으리라. 아무도 없는 중에 스스로 한국인임을 인증하며 집들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르게 생긴 집들 사이에 고양이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직 녀석도 잠에서 일어나긴 이른 시간임에 틀림없었다.
헌데 우리가 도착한 주차장이 마을로 들어오는 유일한 입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실 호수 바로 옆에 매우 큰 주차장이 있다는 것을 호수에 도착해서야 알게 됐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느 유명 관광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체버스가 두 대 서 있었다. 버스는 앞에는 아마도 중국어인 듯한 한자가 적혀 있었다. 이 마을이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드라마 촬영지인데, 그 드라마가 넷플리스에 업로드되더니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꽤나 인기를 끌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여유롭게 마을에 도착했는데, 뭔가 묘하게 공기가 달라졌다. 그렇게 너르고 여유로운 호수를 모두 뒤로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느 한 곳에만 모여들어 북적북적하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으로 다가가보니 생뚱맞게도 유럽 화장실에서나 봄직한 바리케이드와 입장료 수거 기계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부두에서 드라마를 촬영했고, 현빈 배우가 피아노를 연주하던 유명한 장면을 찍은 곳이었다. 모두 그 배우를 상상하며,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그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을 보다 보니, 누가 만든 부두인 줄은 모르겠으나 돈은 제법 벌겠다 싶었다.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긴 하는데 뭔가 요상한 느낌이 일었다. 한적함. 고요하고 한가로운 유럽의 낯설지만 편안한 정서를 충분히 만끽하려던 찰나, 익숙한 풍경과 감상에 또다시 목덜미가 채여 끌려가는 느낌이었달까? 물론 물이 들어온 김에 노를 젓는다고, 누군가 자신의 기회를 살려 돈을 벌겠다는 당연한 마음에 어찌 손가락질을 하겠냐마는 우리 민족의 분주함이 행여 그들은 한가로운 일상을 흔든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오래 잔잔함을 즐기려 했는데, 사람들을 피해 다른 호수로 차를 돌렸다. 브리엔츠를 지나쳐 동쪽으로 조금 더 달리다 보면, 룽게른(Lungern)이란 작은 호수가 있다. 예나 저기나 이미 똑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이 조금 더 적은, 그래서 더 한가로운, 유럽 호수마을의 한적함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만, 여기도 <사랑의 불시착>의 마지막 화를 촬영했던 곳이라 아내가 우리들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만은 '안 비밀'에 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