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인도의 왕자 시타르타는 왕궁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노화와 질병, 죽음에 이르는 소위 <생로병사>의 네가지 고통을 목격했다. 이후 그는 이러한 고통의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이해하고, 이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출가하여 해탈을 위한 수행의 길에 접어들었다.
물론 나는 불교신자는 아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이지만, 나 역시 모든 인생의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성경의 곳곳에서도 삶은 고통스럽고 허무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구절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욥의 삶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 이와 같이 울부짖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는 날이 짧고, 괴로움이 가득하다. (욥14:1, 표준새번역)"
심지어 그는 "그날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태어난 날을 저주했다. 그에게 삶은 고통을 넘어서 절망적인 것이었다. 욥의 예는 사실 극단적으로 부정적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그는 동시에 모두 경험해야 했다. 따라서 대중에게 그의 예는 그리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소위 꽃길만 걸은 사람에게 삶은 어떻게 해석될까? 그들에게 인생은 즐거움, '희'만 가득할까? 이에 대한 적당한 예는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을 들 수 있다. 그는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없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부와 명예, 복을 누렸던 인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삶을 무엇이라 평했는가?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전1:1, 표준새번역)"
'솔로몬은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그래.' 누군가 혹시 그리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부요한 것이 가난한 것보다 낫지. 부요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삶이 평안한 것이야.' 솔로몬은 같은 책에서 이에 대한 질문에도 답한다.
“종은 많이 먹든지 적게 먹든지 편히 자지만, 부자는 배가 불러도 잠을 자지 못한다. (전5:12, 표준새번역)”
인생은 많으나 적으나 불편한 법이다. 그는 오히려 부자들이 더 많은 근심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무릇 지킬 것이 많으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다. 단순함은 버림에서 온다.
그렇다면, 누구의 삶이 더 가벼울까? 누구의 근심이 더 견디기 쉬울까?
이런 질문은 사실 의미 없는 것들이다. 내가 타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듯이,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과 비교할 수 없다. 누구나 자기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타인의 질병보다 더 아픈 법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주관적인 고통만이 역설적이지만 절대적이다. 그 어떤 절대적인 법칙이 없는 이 세상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진실이 또한 절대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타인과 나를 서로 비교할 필요 없다. 내가 아프면 아프다 말하면 그만이다.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더 속상해할 필요도 없다. 나 역시 그들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혜로운 나의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하셨다.
사람들의 인생의 부피와 모양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무게는 똑같을 거야!
적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작은 짐을 지는 것이 옳고, 무거운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다. 그러나 넓은 대양의 바닷물의 염도와 컵에 담은 바닷물의 염도가 서로 다른 질량에도 같은 비율을 유지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지극히 주관적인 삶의 체감의 무게는 동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