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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May 14. 2020

감상을 남기는 행위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다

20200512 경남도립미술관 관람 일지 1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경험한 책이나 음악, 공연, 그림 등 다양한 예술에 대해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미술관에 갈 때마다 마음 속 어딘가에 부담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의식 속에 '예술에 대한 감상을 남길 때에는 작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해야 한다' 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림을 볼 때 그림 자체에 빠지는 것보단 작가의 의도를 해석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제대로 그림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지 생각이 찾아왔다.


내가 하루하루 쓴 글을 모아서 책으로 펴낼 때를 돌이켜보면 이런 마음이었다. 글을 쓰는 건 나의 역할이고, 그걸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건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순간 오로지 독자들의 몫이라는 마음. 내가 그렇다면 다른 창작자, 예술가들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예술은 추상적이기에 해석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의 해석을 새로 써서 붙이면 되지 않을까. 내가 이걸로 시험을 칠 것도 아닌데, 완벽하게 작가의 의도를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고백하자면 나도 내 글에 핵심에서 벗어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꽤나 싫어했다. 글을 읽지 않고 단순히 자기 블로그에도 달리게 하기 위해 의미 없이 댓글을 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의도와 반대로 해석했더라도, 그 해석을 통해 그 사람의 행동이 단 1퍼센트라도 긍정적인 쪽으로 바뀐다면, 그리하여 내 글이 타인에게 선한 영향을 끼친다면 그 글의 의미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저마다의 해석을 환영한다. 그 해석으로 무턱대고 창작자를 조롱하거나 자신의 해석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꽤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작품은 2번 완성된다. 첫 번째는 창작자가 작품을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일 때. 또 하나는 작품을 본 사람들이 저마다의 해석을 마련해 덧붙일 때. 저마다 다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한다. 그렇다면 작품에 대한 감상도 가지각색이지 않을까. 내가 본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온전히 나만의 영역이기에, 더 이상 올바른 해석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편하게 내가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다음에 또 기록으로 남은 감상을 돌아보며 예술에 대한 사랑을 더욱 굳건히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더 이상 부담감이 아닌 가벼운 시선으로 예술을 만끽하고 싶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미술관에 가기 전에 미리 예약하고 가야 했다. 경남도립미술관은 당일 예약도 가능하기에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했다. 20분 가량 달려서 도착한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섰다. 예약을 확인하고 결제한 후 첫 번째 전시실로 들어갔다.


경남 도립 미술관에서는 2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자화상ll - 나를 보다와 새로운 시의 시대.


<자화상Ⅱ-나를 보다>전은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예술가의 시선을 통하여 그들의 예술 작품 속에 녹아있는 시간의 흐름과 인간 내면의 언어를 함께 호흡해보고자 기획되었다. (경남 도립 미술관 홈페이지 전시란 발췌)


가기 전에 미리 홈페이지를 읽어 보았는데,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울까 봐 조금의 자료 조사를 하고 갔다. 그러나 이것저것 살펴보는 사이에 시간은 지나 버렸고... 결국 배경 지식이란 하나도 없는 채로 미술관의 입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러나 웬걸, 예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조사가 부족했던 나도 충분히 감명 깊게 느낄 수 있던 전시였다. 이걸 읽는 독자들은. 혹시 기본적인 배경 지식 없이 미술관을 관람하게 되는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말길 바란다.


문자도를 감상하는 나의 모습이다.

사실 이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냥 슥, 하고 지나갔을 텐데,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르 바라가 경상도 밀양에서 <문자도> 병풍을 구하고 여관방에서 쓴 평문을 읽고는 이 그림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엄격하게 규정된 일종의 양식성'과 '페르시아와 인도 예술에서 유입되었을 기하학적인 요소' 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느끼고 싶어서 그림을 더 자세히 감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나의 작은 병풍이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제반 요소들이 조선인의 국가적 예술 전반에 걸쳐 그 기저를 이루는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 하나는 단순한 그림 하나가 아니라 우리 조선의 예술 전반을 아울러 보여줄 수 있는 폭넓은 세계를 담은 그림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그림 앞에 몇 분 동안 서서 우리 조선 사람들의 예술, 영혼,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림에서 전해져 나오는 어떤 파동은 마치 당대의 예술과들과 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이 그림 한 장으로 그 시절의 우리 나라 정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나는 2020년에 미술관 안에서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지만, 또 하나의 나는 1888년으로로 가서 샤를르 바라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길가에서 병풍을 구입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붓에 먹물을 묻히고 문자도 병풍을 그렸던 어떤 화가의 방 안에도 들어가 있었다. 놀랍도록 신기한 경험이었다.


문자도의 여러 그림 중 가장 내 마음을 울린 것들만 꼽았다. 첫 번째 그림을 보자. 저 시절에는 붓에 먹물을 묻혀 그렸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섬세하고 세밀한 선을 여러 개 그어 대나무의 음영을 표현한 것이 경이로웠다. 나는 한국화의 섬세하고 신중해 사랑스러움마저 느껴지는 붓 터치를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두 번째는 물고기의 비늘, 얼굴, 몸에 각각 다른 기법이 사용된 것과 물고기 비늘의 섬세함에 매력을 느꼈다. 비늘 사이사이의 하얀 선에 먹이 하나도 번지지 않고 선명한 공백의 유지하고 있는 것이 감탄사를 유발한다. 마지막은 샤를르 바라가 말한 '페르시아와 인도 예술에서 유입되었을 기하학적인 요소' 가 가장 잘 엿보이는 것 같아 넣었다. 특히 눈 모양이 인도의 그림에서 나올 법하게 생겼다.

밀양 문자도의 전체 모습을 찍어 보았다.

밀양 문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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