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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Dec 08. 2023

사계 [사계, sʰag(y)e]

지구에 계절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같은 양의 빛에너지라면, 좁은 면적에 떨어질 때가 넓은 면적에 떨어질 때보다 지면이 더 쉽게 달궈질 것이다. 돋보기를 사용해 종이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북반구를 기준으로, 자전축이 태양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는 햇빛이 수직으로 들어와 좁은 면적에 닿는다. 반면 자전축이 태양과 반대로 기울어진 상태에는 햇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와 넓은 면적에 떨어진다. 시기에 따라 빛에너지가 닿는 면적이 달라져 계절이 구분되는 것이다.


위도가 같은 나라들은 계절이 같고,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절은 서로 반대다. 적도는 계절 구분이 거의 되지 않고, 그나마 극지방은 일부 지역에서 눈이 녹는 둥 미약하게나마 계절을 구분할 수 있다. 생물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계절은 환경의 일부다. 그래서 사람마다 선호하는 계절과 계절을 보내는 방식이 다르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절이든, 극지방의 계절이든, 적도의 계절이든, 우리네 인생사처럼 모든 것들에는 장단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 더 낫다고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내가 평생 살아온 대한민국의 사계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봄은 생명이 태동하는 시기다. 다채로운 꽃이 봄에 피기 시작하고, 겨우내 웅크린 동물도 봄이 되어서야 몸을 움직인다. 한국에서는 학기가 시작되는 때이기도 하다. 새로운 꽃과 새로운 동물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생긴다. 그래서 봄철에 설렘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 좋은 예시가 벚꽃축제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벚꽃이 피는 3~4월엔 벚나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붐빈다. 공원이나 산책로에 줄지어 만개한 벚나무 행렬은 사진으로도 담기 어려울 만큼 장관을 이룬다. 나무에 잔뜩 걸린 흰색과 분홍색의 꽃잎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면, 따뜻한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미끄럽지도, 차갑지도 않은 눈이라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다.


벚나무와 함께 벚나무속에 속하는 매화나무와 살구나무는 꽃잎을 가까이서 보지 않는 한 구분이 쉽지 않다. 보통은 몇 주 간격을 두고 피기 때문에 시기로 구분한다.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벚꽃은 아직 기다란 봉오리 상태다. 인간에게 봄이면 다 똑같은 봄일 뿐인데, 나무는 계절을 며칠 단위로 세밀하게 느끼나 보다. 그도 그럴 게, 개화는 기온에 영향을 받는다. 작물을 재배하는 전문가들은 적산온도로 개화일을 예측한다. 적산온도도 일평균 기온을 바탕으로 계산한다. 2023년의 벚꽃은 2022년에 비해 14일 일찍 피었다. 100년 전에 비하면 매화나무는 53일, 벚나무는 21일 개화가 빨라졌다. 온난화로 평균 기온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여름은 온난화가 가장 크게 체감되는 계절이다. 툇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는 걸로 충분히 여름을 날 수 있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에어컨이 없으면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열역학 제2법칙은 닫힌계에서의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냉장고의 몸 안은 차갑지만, 본체 뒤에는 뜨거운 열이 나온다. 냉장고는 외부와도 상호작용 하고 있으므로, 닫힌계는 냉장고 내부가 아니라, 냉장고가 놓인 주방이 될 것이다. 엔트로피와 열에너지는 비례한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어 놓아도 주방은 언젠가 더워진다. 에어컨은 냉장고와 원리가 같다. 에어컨 실외기를 방 안에 두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에어컨은 방 안을 시원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열에너지를 실외기로 내뿜기 때문이다. 실외기가 외부로 향해 있어서 닫힌계는 지구이고, 에어컨을 사용할수록 지구의 평균 기온이 높아지게 된다. 인간을 위한 일이 인간을 갉아 먹는 셈이다.


몇 주간 넓은 지역에 꾸준하게 비가 내리는 여름 장마도 짧은 시간 한꺼번에 몰아치는 국지성 집중호우처럼 변해간다.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우리나라의 기후가 아열대성 기후로 변했다는 시각도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하다. 그러나 2023년 기준으로 일 년 사이에 여름 기온이 1도 높아졌고 강수량이 291밀리미터 더 많아졌다는 통계는 우리나라도 언젠가 열대 기후를 맞이할 것이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열대지방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과 지혜를 배워 앞으로 맞이할 새로운 기후에 관한 대처법을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기상전문가 반기성 교수는 너무 더우면 입맛이 사라지는 것처럼 열대지방 사람들은 대체로 식탐이 적은데, 반대로 기후 특성상 과일 같은 먹을 것이 풍족해 시간을 보내는 데에 여유가 있다고 한다. 해당 주제에 관한 연구는 찾을 수 없었지만, 기온과 습도가 높으면 활동하기 힘들다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일부 열대지역에는 무더운 날 오후에 2시간 정도 일을 하지 않고 쉬는 ‘시에스타’라는 문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휴가나 방학은 여름에 몰려있다. 시간이 지나 대한민국의 여름이 더욱 더워진다면, 노동자에게 제공되는 여가와 복지도 더 늘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노동자에 대한 사회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가을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뜨겁던 열기가 사그라드는 과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매미나 개구리 같은 소리꾼들의 소리가 줄어들고 다채롭게 물들었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가을에도 피는 꽃이 있다. 물봉선은 이름처럼 물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꽃이다. 봉선화들의 꽃말은 “나를 건드리지 마시오”인데, 특히, 그중 물봉선의 열매는 살짝만 건드려도 터지면서 씨앗을 멀리 퍼뜨린다. 씨앗은 새로운 시작이다. 가을에 소멸하는 듯한 식물들도 다음 단계를 위해 잠시 숨 고르는 중일 뿐이다.


수명이 다한 벼가 낱알을 떨어뜨린다고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낱알은 다시 대지로 돌아가고, 또 어떤 낱알은 인간이란 다른 생명을 살게 만든다. 낱알은 벼의 유전자를 품고 있고 인간은 그 유전자를 보호하기 때문에,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길로 들어서도 종의 존속에 유리하다. 농작물과 인간은 한쪽이 우위에 있지 않은 채 서로 동등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 관계라 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추수 시기에 명절이 생긴 걸 보면, 우리의 조상들도 식물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것도 의미없이 태어나 의미없이 사라지는 게 없다.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 가장 추운 시기이다. 한 해 동안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봄을 준비하는 때라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 눈에는 형형색색의 꽃도 없고 동물도 거의 보이지 않으니, 어찌보면 가장 침체된 것처럼 보이는 계절이다. 각종 창작물에서는 겨울을 ‘위기’, ‘위험’ 같은 의미로 은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겨울에도 생명이 살아 숨쉰다. 목서의 꽃말은 첫사랑이고, 백서향의 꽃말은 꿈속의 사랑이며, 동백꽃의 꽃말은 애타는 사랑이다. 모두 겨울에 피는 꽃이다. 꽃말을 붙인 누군가는 겨울 꽃들을 보며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겨울에 사람은 따뜻한 실내공간에서 가까운 이들과 함께한다. 들창코원숭이나 황제펭귄 같은 한대기후에 사는 동물들도 가장 추워지는 시기에는 다른 개체들과 몸을 맞대어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겨울 꽃 중 하나는 동백꽃일 게다. 동백꽃은 눈 덮인 곳에서도 가장 따뜻한 붉은색 꽃잎을 뽐낸다. 그 아름다운 발화에도 불구하고 추위에 약한 나비나 벌은 수분을 도와줄 수 없다. 그래서 벌과 나비 대신 동박새가 수줍게 얼굴을 내민 동백꽃과 마주보며 함께 겨울을 난다. 동백꽃은 꿀을 제공하고 동박새는 꽃가루를 퍼뜨린다. 다람쥐와 청설모는 같은 과에 속하는데, 생태적 차이 중 하나는 겨울잠의 유무이다.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와 달리 청설모는 겨울에도 솔방울을 까먹으며 소나무 씨앗을 퍼뜨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없다고 치부할 수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비발디는 《사계》를 통해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계절의 다양성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곤 한다. 어떤 계절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생물들처럼, 자신의 계절에도 보듬어 줄 구석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자연은 이산적이지 않고 선형적이다. 봄의 노래와, 여름의 열정과, 가을의 휴식과, 겨울의 사랑은 별개의 곡이 아닌 화음에 가깝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안다면, 지금 놓인 날과 앞으로 다가올 날이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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