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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Dec 29. 2023

역설 [역썰, yʌk̚s̕ʌl]

현대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모든 현생 생물의 조상은 약 35억부터 40억 년 사이에 발생한 단세포 원핵생물로 추정된다. 그 작은 우주가 지구 전역에 퍼지면서 저마다 다른 환경에 적응한 것이 오늘날 생물 다양성이다. 같은 조상으로부터 파생되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현재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례로, 인간과 도요새와 연어는 형태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나 너무도 다르지만, 그 셋을 포함한 척추동물의 배아는 전문가가 아닌 이상 구분이 쉽지 않다.


맨눈으로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부학적인 부분으로 접근하면 더욱 흥미롭다. 모든 척삭동물의 배아는 척삭, 빈 신경삭, 인두열, 근육성 꼬리라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척삭은 지지대 역할을 하는 유연한 골격이다. 척추동물의 척추는 척삭과 주변 관절이 발달한 형태다. 많은 척추동물의 척삭은 성체가 되면 흔적기관으로 남게 되는데, 디스크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추간판이 그중 하나다. 빈 신경삭은 척삭보다 더 바깥쪽에 위치하는 기관으로 개체가 성장할수록 뇌와 척수로 이루어진 중추신경계로 발달한다.


척삭동물의 소화관은 입과 항문이 한 길로 연결되어 있다. 입 다음에 오는 부위를 인두라고 칭하는데, 인두열이라는 틈새가 있어 부유물을 걸러 먹는 역할을 한다. 척추동물은 인두궁이란 골격이 인두열을 지지한다. 사지가 없는 척추동물은 인두열과 인두궁이 발달하여 아가미가 되고, 사지가 있는 척추동물은 귀나 머리의 다른 구조가 된다. 멍게와 미더덕이 포함된 피낭동물은 유생 시기에 올챙이 같은 모습으로 헤엄친다. 근육성 꼬리와 척삭 덕분이다. 물론 인두열과 빈 신경삭도 있다. 그래서 피낭동물은 척삭동물문으로 분류되며, 멍게와 미더덕은 오징어나 문어 같은 무척추동물에 비해 인간과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팔, 고양이의 다리, 박쥐의 날개, 고래의 지느러미는 모두 다른 외형을 가졌지만, 배아와 마찬가지로 해부학적으로 비교하면 구조가 같다. 기다란 위팔뼈에 요골과 자뼈가 붙어 아래팔을 만든다. 그다음으로는 몇 개의 작은 뼈로 이루어진 손목뼈가 붙고, 이어서 몇 개의 손바닥뼈와 여러 개의 손가락뼈가 따라붙는다.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모두 같다. 인간으로 비유하면, 손가락과 아래팔 사이에 막이 붙은 게 박쥐의 날개이며, 손가락 마디의 개수가 많아져서 한 가죽으로 넓게 덮인 게 고래의 앞 지느러미다.


이는 생명과학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다. 물리학에서는 이 우주에 놓인 존재들이 모두 열일곱 가지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네 가지 힘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지구를 딛고 아름답게 합주하는 생물 다양성을 넘어서, 오리온의 어깨에 놓여 붉게 발화하는 베텔게우스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겉모습이 다르더라도 우주의 모든 것은 상대성 이론으로 왜곡된 중력장을 유영하고 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한 곳에서 흩뿌려진 알갱이들이 저마다 다르게 뭉쳐 모양을 빚을지언정, 알갱이라는 본질은 왜곡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같으면서 다르다는 생각은 과거의 사람들도 알았던 듯하다. 불교에서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정신을 통해 나와 남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남을 대할 때는 나를 생각하며 존중해야 하고, 나를 대할 때는 남을 생각하며 겸손해야 한다. 《마태오 복음서》 22장 39절에 예수가 가장 큰 계명으로 언급하는 것 중 하나가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듣는 이 역시 누군가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던 시대에도 이해하던 ‘역지사지’가 요즘 시대에 가장 필요한 단어가 되었다는 점은 생각이 많아지게 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역설적이기 때문일까?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예’, ‘아니오’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살인은 잘못된 것일까? 물론 당연히 잘못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폭력은 안 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싸우는 법을 배운 아이에게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사람을 해하면 안 된다’며 다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 인터넷 세상을 보면, 복잡한 문제에 대해 정답만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쉽사리 돌을 던진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답’보다 ‘정도’다.


인간이 역설적이란 사실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우리 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신경과학자들은 쾌락에 관여하는 뇌의 한 부분에서 고통도 함께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뇌의 특정 부분에서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인간은 도파민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행복감과 우울감을 느낀다. 흔히 도파민은 행복에만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운동기능, 동기부여, 뇌하수체 호르몬 조절 등에도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도파민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면, 각종 정신 질환이 야기되기도 한다.


정신의학자 애나 렘키 박사는 《도파민네이션》을 통해 도파민을 쾌락과 고통이 장난치는 저울에 비유한다. 예컨대 도파민이 0인 사람에게 10만큼의 도파민이 분비된다면, 10만큼 즐거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 사람의 원래 수치인 0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보자. 평소에도 0이었으니까 0은 아무렇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뇌는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10만큼 도파민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쾌락을 느끼는 만큼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다. 밤 늦게까지 사교모임을 가진 뒤 집으로 혼자 돌아갈 때 찾아오는 허한 감정도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한다.


문제는 인간의 적응 능력이다. 일반인과 격투기 선수의 맷집은 다르다. 일반인이나 격투기 선수나똑같이 통각을 가질 텐데, 그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격투기 선수들은 평소에 강도 높은 훈련으로 고통에 적응해 있기 때문이다. 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앞선 예시의 사람에게 10만큼의 도파민이 꾸준하게 분비되면, 어느새 그 수치에 적응해 10만큼의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 반면, 그 후에 찾아오는 고통은 갈수록 더 강해진다. 쾌락과 고통의 저울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되레 고통 쪽으로 더 기우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일이든 처음은 설레지만, 그 이후로는 처음 만큼의 즐거움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마약 중독자들도 갈수록 더 강한 마약을 찾는다. 이 과정을 과학적 용어로 신경 적응이라 한다.


도파민의 중요한 작동원리 중 하나는 보상회로다. 도파민은 어떤 행위의 보상을 받았을 때 가장 크게 분비되지만, 보상이 발생하기 전까지도 꾸준히 분비된다. 이를 나타낸 실험이 있다. 쥐에게 보상(먹이나 약물)이 주어지기 전, 먼저 불빛을 쬐여준다. 불빛을 본 쥐에게 버튼을 제공하고 버튼을 누르면 보상을 준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쥐에게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을 관찰한다. 파블로프 실험처럼 과정에 적응한 쥐는 불빛을 보자마자 도파민이 소폭 상승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항상성으로 인해 도파민이 증가된 것보다 억제되어 오히려 더 큰 갈망을 원하게 된다.


보상에 많이 중독된 개체일수록 버튼을 빨리 누르거나 보상을 기대하는 특정 행동을 반복한다. 만약 버튼을 누르고 나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매우 큰 폭으로 도파민이 억제된다. 예컨대 알코올 사용장애 환자는 술을 마시지 않을 때 실제로 큰 일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불안감을 느낀다. 이렇게만 보면 도파민이 무슨 사람을 힘들게만 만드는 쓸모 없는 호르몬처럼 보인다. 그 생각과 달리 도파민은 인간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앞선 쥐 실험에서 초점을 맞춰야 할 부분은 ‘쾌락만큼 고통이 찾아온다’보다 ‘보상이 주어지기 전에도 도파민이 분비된다’이다.


보상이 주어지기 전에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직장인들은 한 달 후의 월급을 기대하며 일을 한다. 일이란 건 누구나 하기 싫지만, 하게끔 만드는 것이 월급이란 보상을 얻기 전까지 분비되는 도파민 덕분이다. 작가 에란 카츠는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 뇌는 활동을 멈춘다”고 말했다. 사실 아무리 편안한 상태라도 뇌는 안 멈춘다. 다만 어디론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불편한 일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자극적이지 않은 적당한 쾌락과 적당한 고통을 저울 위에 평행하게 고요히 얹어놓아야, 도파민이 우리의 정신을 망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책, 음식, 음악, 동영상, SNS, 도박, 술, 담배, 마약…. 우리 뇌를 자극하는 모든 것들은 그 종류에 상관없이 크든 작든 도파민을 자극한다. 도파민을 쉽고 빠르고 크게 얻는 일일수록 과정에서 얻는 도파민은 무시되기 쉽고,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따라오는 고통도 크다. 유튜브 쇼츠를 20분, 30분 멍하니 보고나면 ‘알찼다’라는 느낌보다 어딘가 찝찝한 경우가 많다. 흥미를 이끈 영상을 보기 위해, 관심 없는 영상을 대여섯개씩 지나치기 때문에,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뇌는 기대한 보상을 얻지 못해 고통이 쌓이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뇌를 자극하는 마약성 약물보다,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곱씹는 독서가 뇌 건강에 좋은 이유도 주된 쾌락이 보상에서 오느냐 과정에서 오느냐 차이에서 온다.


기술이 발전하고 풍요로운 시대가 되었다. 과한 풍요가 오히려 마음의 빈곤을 만든다. 사회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이슈만 좇아 손가락질 하는 이들도 쾌락이란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꾸준하게 도파민이 분비될 수 있는, 과정이 즐거운 일을 만드는 거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난하는 건 스스로를 좀먹는 행위다. 타인의 모습 같은 결과를 평가하기보다 타인이 자신과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 과정을 이해하면, 꽃을 꺾던 사람도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는 민들레가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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