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입국심사
13시간의 비행 후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착륙 후 내릴 준비를 하는 내내 폴란드항공(LOT) 기내에는 잔잔한 클래식이 울려 퍼졌다. '쇼팽(Chopin)'이었다. 난 음악과 미술 기타 등등에 문외한이라 프레드릭 쇼팽이 폴란드의 작곡가 인지도, 바르샤바 공항의 풀 네임을 보고서야 알았다.
바르샤바 쇼팽 공항
Lotnisko Chopina Warszawa
와우. 공항 이름이 너무 예쁜데?
도착하기 전부터 내가 '쇼팽 공항'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비행기에서 쇼팽의 피아노곡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거다.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라 그랬나, 장시간의 비행 후 텁텁해진 입맛을 다시며 승객들 틈에 서 있던 그 시간은, 내게 더없이 낭만적인 시작이라 느껴졌다.
해외살이 2년을 하는 동안, 참 여러 번의 입국 심사를 해 왔다. 장기체류가 처음인 대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비자를 받는 시스템이라 무척 긴장했던 아일랜드, 비자는 있으나 왠지 그냥 긴장했던 호주(그런데 자동출입국이라 막상 심사도 없었던), 의외로 까다롭다 하여 간간이 긴장했던 말레이시아. 그리고 그 외 숱한 여행지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한들, 새로운 나라에서의 새로운 입국심사는 언제나 긴장되는 것이었다. 갓 도착한 한국발 비행기에서 내린 한국인들로 인해 'All Passport'에 긴 줄이 늘어졌다. 반면, 'EU citizen' 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안국역 근처에 위치한 주한폴란드대사관에서 받은 비자 스탬프 페이지를 손가락에 끼워놓고, 여권을 괜히 흔들흔들거리며 입국 심사대 앞쪽을 휘익 살폈다.
'ㅍ'의 거센소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폴란드'하면 되게 빡빡할 것 같았다. 유들유들한 나라도 입국심사만큼은 빡빡한데. 빡빡한 나라의 입국심사는 그럼 얼마나 빡빡할까. 13시간 동안 함께 한 천사 미소의 폴란드 승무원 언니들과 아름다운 선율의 쇼팽곡을 곧장 잊어버린 건지, 저 앞의 무표정한 폴란드 입국 심사관들을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내 담당 출입국 담당관은,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뒤로 싹 잡아 넘긴 포니테일의 금발 폴란드 여성이었다. 마음속으로 '언니'라고 불렀던 폴란드항공의 승무원분들과 흡사한 연령대와 외모였지만(즉, 무척 아름다우셨지만) 왠지 '언니'라고 부르기는 뭣한 상황이니까.
"Dzien dobry."
[진도브레]
폴란드어 인사와 함께 나는 최대한의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여권을 스윽 내밀었다. '나는 비자가 있습니다. 불법 체류 따위,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의 뜻을, 은은하게 올린 입꼬리와 살금거리는 몸짓으로 내비쳤다. 일단 여권부터 살펴볼 줄 알았던 출입국 심사관은 내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그러고는 활짝 웃었다.
Oh! You can do polish?
응?
폴리쉬?
나는 비영어권 해외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여행은 숱하게 가보았지만, 그때마다 길어봐야 일주일만 머물 그 나라들의 인사말을 일일이 습득할만한 성실함은 내게 없었다. 어딜 가든 Hello였다. 만국공통 Hello. 장기 체류로 들어온 비영어권도 처음이고, 그러니까 비영어권의 입국심사에서 그 나라 언어로 인사를 한 것도, 처음이었다.
아!
폴리쉬!
'여긴 왜 왔니?' 등을 먼저 기대했던 나는 예상치 못한 첫 질문에 순간 어버버거렸다. 그러다 이내 출입국 심사관 언니의 눈을 보며 멋쩍게 입을 뗐다.
"Oooooh····No. Nie. I can't. I only know a few words. Dzien dobry, Dziekuje ㅎㅎ..."
*Nie : 아니요.
Dzien dobry : 안녕하세요.
Dziekuje : 감사합니다.
"Ah...ㅎ"
어쩐지 살짝 가라앉은 출입국 심사관 언니의 미소에 나는 별안간 죄책감이 들었다. 폴란드어를 좀 많이 배우고 왔어야지, 인간아! 그 순간만큼 나의 게으름을 타박한 적이 또 없었다.
폴란드 입국심사, 그 후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영어로.
출입국 언니(P), 나(나)
P : (여권 파라락) How long will you stay here?
나 : (무해한 미소 다시 장착) About a year.
P : What are you going to do?
나 : Umm. My husband is working here. So I just stay with him and travel or something. (난 그저 가족의 일원으로 왔고, 여행과 쉼 외에 어떤 불법적인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를 내비치는 무해한 몸짓을 하며)
P : Husband? (왜인지 깜짝 놀라심, 내가... 어려 보였나...?ㅎ 멋대로 기분좋아짐) Ah, well. Ok. (여권 돌려주시며) Hope you enjoy. (환한 미소)
나 : Dziekuje.
P : (날 보고 분명 귀엽다는 듯 웃으신!) Dziekuje.
그렇게 나는 약간의 긴장과, 또 약간의 어버버와, 여러 번의 웃음으로 폴란드에 무사히 입국했다.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들어섰다. 폴란드항공과 잔잔히 흘러나온 쇼팽, 출입국 심사관 언니의 근사한 미소.
그러니까 이건, 더없이 낭만적인 유럽 생활의 시작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