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감상
근데 읽고보니 내가 남녀 대립적 페미니스트였던 후기
다소 생소하고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담론이 실린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 얼마나 파격적이냐면 보통 당연히 받아들이는 가부장제 "이론"을 비판한다. (이유가 있음 일단 읽어보셈) 책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남들이 읽고 어떻게 느낄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추천글까지 쓰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인 정체성 정치 그리고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용어가 생소하다면 아래를 읽어보라. 놀랍도록 익숙할 것이다.) 특히 굵직한 여성운동 플로우와 함께 엮어 풀어나가는 흐름이 한국 페미니스트 독자에게는 참을 수 없이 흥미롭다. 저자는 당위성이나 도덕적인 면보다 운동의 전략적 측면에서 많은 것을 분석함을 염두에 두면 좋다.
정체성 정치란, 특정 정체성(성별, 인종, 문화 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차별에 맞서 뭉치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에 있어 정체성 정치란 여성이라는 성별을 바탕으로 하여 성차별을 반대하는 것이다.
"엥..? 당연한 소리 아니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던 해당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지적할 때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논하기 전, 정체성 정치와 마르크스주의가 필연적으로 엇갈릴 수밖에 없는 차이점을 먼저 짚어보자.
1. 정체성과 계급
정체성과 계급이 다른 이유는, 계급¹은 계급이 아닌 다른 범주(예: 인종)가 배제하는 것을 포함하고, 해당 범주가 포함하는 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쉽게 도식화하자면,
✔ 정체성 정치
: 노동계급 정치가 분열시키는 사람들(예: 흑인 자본가 - 백인 노동가)을 단결시킬 수 있다.
✔ 노동계급 관점
: 정체성 정치에서 주로 분열되는 사람들(예: 여성-남성)을 투쟁 속에서 단결시킨다.
여기서 도출되는 정체성 정치 페미니즘의 약점은, 여성 간에도 존재하는 계급·권력 차이를 흐린다는 것이다.
부유층 여성에게는 차별을 완화할 권력이 존재하는 반면, 서민층 여성은 그렇지 않다.
→ 이는 높은 확률로 분열을 낳는다.
→ 분열은 운동의 지속성에 있어 아주 취약한 요소이다.
2. 차별의 원인
또한 두 이론의 가장 명확한 차이점은, 차별의 근본적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의 원인을 가부장제도 여성혐오도 아닌 '노동력 재생산'에서 찾는다. 즉, 자본주의를 끝내야 여성차별도 끝낼 수 있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저자의 입장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가리고 아웅하기이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일단 가부장제 이론 자체를 부정하거니와) 가부장제←라고 칭해지는 문화구조 또한 자본주의의 부산물인데, 그것을 최종 타깃으로 삼아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존속의 제물일 뿐이다.
이 점을 기억하고, 다음 논의로 넘어가 보자. (이 책의 구성방식은 아주 점진적이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남성은 여성에 대하여 기득권이거나, 잠재적 가해자라는 시각이다. (❗분리주의와는 다르다.)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의 강점: 초기에 강한 진영 유입 효과를 지닌다. 왜냐하면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의 도식—도덕적인 여성vs악한 남성—이 아주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단순함과 순진함이 자충수가 되곤 한다. 특히 남성 개인과 여성 개인 간의 분쟁이 일어날 때 더욱 그러하다. 성별 도덕주의에 따른 판단은 사건의 양상에 따라 페미니즘의 신뢰성이 저하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저자의 견해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²도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의 한계에 포함된다.)
즉, 충분히 성공적인 전략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 개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저자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경계한다.³) 어떠한 구조적 성취를 이루어내기 위한 사회운동이므로 분명히 전략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과 스탠스를 같이 하는 정치집단(주로 민주당, 좌파)의 반대(우파) 정치집단에 상당히 득이 된다. 물론 특정 정치집단이 페미니스트 혹은 반페미니스트 집단은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박원순 사건 때 국힘은 대단한 페미니스트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이는 아래 정치 세력을 다루며 다시 언급하겠다.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
만약 그렇다면,
래디컬 페미니스트인가?
.
.
.
제4물결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2030 페미니스트라면 높은 확률로 그렇다.⁴
여기서 '급진적'이라는 단어는, 정도의 강하고 약함을 나타내지 않는다. “근본적 관점으로 사회를 보고 사회의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함을 지칭한다. 즉, “기본 사회가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고 그 위계 체제가 여성 차별적이고 남성 본위”라고 본다면, 그러한 가부장제 사회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급진적인 관점이다. ('엥? 내 얘기였네?')
마르크스주의도 래디컬 페미니즘도 혁명적, 구조적 사고방식을 띠는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래디컬 페미니즘은 계급이나 자본보다 문화에 중점을 둔다.
래디컬 페미니즘도 마르크스주의도 거시적인 관점으로 문제를 분석하고 사회 변혁을 추구하지만, (역사유물론과 달리) 급진적 페미니즘은 “관념론적이고 비역사적이다.”
아까 스스로가 래디컬 페미니스트임을 부정했다면, 그때 떠오른 인상이 분리주의와 가까울지도 모른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을 배제한다.
4B운동(비혼·비연애·비출산·비섹스)이나, 특정 시위에 생물학적 남성은 참여 불가능하다는 기준이 정해지는 것이 그 예시이다.
이처럼 급진주의도 분리주의도 생물학적 성차를 기반으로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이 있다. 성별 차이가 생물학적 성차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성평등을 위한 투쟁이라는 명목에 근본적인 모순이 생긴다. "남녀 행동의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임을 우리는 전제로 하지 않던가?⁵
한국의 대표적 분리주의 페미니즘 사례는, 위에서 언급한 '특정 시위', 즉 '불편한 용기'(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이다. 해당 시위는 어떠한 정치세력/여성단체와도 연관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생물학적 성별만으로 모이고 흩어진 이례적 규모의 아나키즘적 조직이다. 저자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의의보다는 한계를 찾으며 엥겔스의 말을 인용한다.
정치를 삼가는 건 사실 정치를 자유주의적 정치인이나 개혁주의적 정치인에게 맡기는 셈이다.
정치로부터 완전히 결벽적인 상태로는 지속적인 힘을 모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정체성 정치 페미니즘의 정치 세력 진입을 어떻게 볼까?
앞서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이 정치 세력 앞에서 얼마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지 언급했다. 박원순 사건 당시, 주로 민주당 의원이 사용한 ‘피해호소인’⁶이라는 단어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도 적절치 않았다.) 그런데 분명 특정 진영에서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구는 행태에는 왠지 기분이 석연찮아진다.
언제부터 젠더감수성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젠더 의제가 정치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사건은 결코 한 층위에서 전개되지 않는다.⁷
여성 단체가 직접 정치권에 개입하는 젠더 거버넌스는 어떨까? 법제도 제정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긍정적인 변화가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민간 활동가가 국가기구에 포섭됨에 따라 소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즉 정부 눈치를 보게 되는 상황을 비판한다. 사례로 2006년 KTX 여성 승무원 노동자 투쟁⁸ 당시 국무총리 한명숙(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출신)이 호소하는 노동자를 외면하였음을 든다.
성 주류화 및 젠더 거버넌스가 확산되는 시기였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 노동자의 생활조건(이에 따라 노동계급 여성의 조건도)은 악화되었다. 여성 비정규직 증가, (완화되던) 성별 임금격차 정체가 그것이다. 저자는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부상한 젠더 거버넌스도 여성의 정치권 진입은 포섭에 불과하며, 성별보다 계급이 핵심임을 피력한다.
정체성 정치를 논하며 빠질 수 없는 제재가 바로 트랜스젠더, 그중에서도 트랜스 여성에 대한 논의이다. 트랜스젠더를 연대 대상에 '끼워'주는가 아닌가는 페미니스트 운동 진영에 있어 적잖이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저자에 의하면 이는 정체성 정치에서 해결되기 힘든 사안이다. 정체성 정치의 분열을 막기 위해 '진짜 여성'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와 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의 단골 변명 중 하나는 트랜스젠더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가해자라는 도식이 틀린 것처럼 트랜스젠더=위험하다는 도식도 틀렸다. (심지어, 해당 주장의 근거로 쓰이는 많은 사건은 해외 반 트랜스젠더 사이트에서 가져온 가짜뉴스를 검증 없이 번역한 사례가 많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저자는 앞서 (유물론인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정체성 정치는 너무나도 문화 중심이라고 비판했다. 그것의 연장선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계와 속성은 YES or NO로 정확히 나눌 수 있지만, 성별과 같은 정체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운동에 있어 비효율적인 분열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저자: 남녀 대립적 페미니스트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기득권이라는 특권 이론을 주장한다.
나: 아…아니야?
극단적인 예로 시작하자면 재벌 여성과 흙수저 남성이 있을 때 남성과 여성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는 남성이 기득권일 수 있지만, 경제적 계층적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득권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 차이라기보다는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를 다르게 바라보기 때문에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노동-착취라는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반면,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은 남성-여성 간 위계로 조직되어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와 여성 혐오 사회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 본인의 추측이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을 착취 제도의 일종으로 보기 때문에 남성 일반을 기득권으로 규정하는 이론에 찬성할 수 없는 것 같다. ← 가부장제 이론 자체를 비판한다. (재밌음 읽어보세요)
이 이론은 성별 밖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
저자: 시스젠더들은 자신들의 '시스젠더 권력'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아…아니야?
이러한 시각은 차별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사회구조와 지배계급을 보이지 않게 한다. 이러한 개인 간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연대 강화에 해가 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이 "차별을 겪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노동계급에게 이득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정체성 기반의 특권 이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기득권을 가리는 효과만 낳는다. (190) 그리고 이것은 차별을 부추긴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정확히 노린 것이다.
"여성과 성소수자 해방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가 폐지돼야 한다."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는 정체성 정치에서는 다른 곳에 놓여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같은 곳에 있다. 자본주의는 반-페미니즘적 제도일수밖에 없는데, 자본주의가 가장 중시하는 노동력 재생산은 가족제도의 안정적 유지로부터 오고, 그를 위해 이분법적 성별 규범과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여성혐오, 생물학적 결정론, 트랜스젠더 배척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한다.
감상
마르크스주의는 거시적이다. 많은 것이 세세하게 나뉘는 정체성 정치와 달리, 자본가vs노동가라는 대립체제는 물질적으로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괴리감을 설명하기 충분치 않아서 문화중심적이고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이론이 나왔으며, 그에 공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권 이론에 약점이 있긴 하지만 경향성을 제쳐둘 수 있는가, 노동할 수 없는 몸은? 분화된 현대 사회에서 노동계급을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가(는 아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다 반론을 써놨을 것이고 내가 읽어봐야 알겠지만) 궁금증이 들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차별 철폐와 여성차별 철폐는 같은 선상에 있으므로 어느 한 쪽만 나아질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것이 인상깊었다.
모든 의견을 수용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 것치고 본인이 저자의 논지를 잘못 파악했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므로 비판이나 반박은 이 책을 꼭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저자의 다른 글이 궁금하다면? https://marx21.or.kr/author/17
1) '계급'이란 존재하는 순간부터 불평등을 전제하는 단어이다. 크로익스의 표현으로는 ”계급은 착취라는 사실의 집단적.사회적 표현“이다.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주의자는 “노동자들이 모든 종류의 차별(어느 계급이 당하는 것이든)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노동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61)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은 같지만, 초점을 노동계급에 둔다는 것이 차이점인 것이다.
2) 강남역 살인사건이 '묻지마 살인'이라는 기술(146)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다. 해당 사건이 전문가에 의해 '묻지마 범죄'로 분류된 것은 범인이 정신장애를 가졌다는 점과 이것을 혐오범죄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인데, 김민정 연구자의 아티클을 참조하라. “평소 여자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경찰청, 2016; 「한겨레 21」, 2016.5.31.에서 재인용)”,... “계집년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다(대검찰청, 2015)”, 여자가 다 싫다(윤정숙 외, 2014)” 등의 가해자 진술에서 여성혐오에서 기인한 여성살해동기를 찾지 못했다는 점이 놀랍다. 물론 범죄학의 기준에 따른 것이나, 그 기준이 남성중심적으로 설계되어 있어 사회의 젠더권력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구조 및 문화의 맥락을 삭제한 채 정신질환 혐오 정서를 이용하여 가해자 개인만을 문제시함으로써 여성혐오를 비롯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 문제를 비가시화"하는 행위이다. 딱딱 가를 수 없는 혐오범죄적 측면과 정신질환에 의한 가속화 중 어느 한쪽을 골라 명명한 결과를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3) 저자는 68혁명 이래 전개된(그리고 2010년대 이후 한국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나타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라는 구호 아래 이행되는 일상의 실천(탈코르셋 운동 등)은 “여성들이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덜 갖게”만들었다고 지적한다. (tmi: 본인은 좀 좋아하던 구호임)
4) 그럼에도 한국 SNS에서는 '랟펨' 혹은 'TERF'로 칭해지는 분리주의 페미니스트 진영을 칭하게 될 때가 더 많다. (또한, 그들도 스스로를 래디컬이라고 칭한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학술적 영역에서가 아닐까 한다.
5) 이중 한 사례가 스웨덴의 보상교육(단일 성별 집단 고정관념에 상반되는 교육을 강조)이라고 할 수 있다.
6) 해당 단어는 이때 처음 쓰인 것이 아니라, 2010년대 초 더욱 복잡한 맥락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초로 용어를 사용한 류한수진 님의 페이스북 링크
7) 일련의 흐름으로 신지예 당시 대선후보가 윤석열 캠프로 합류하기도 했다. 윤캠프는 페미니스트 여성 정치인을 끌어옴으로써 2030 여성의 표를 가져올 작정이었겠지만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은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신미섭 님은 인터뷰에서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라고 하지만 … 젊은 여성은 더는 그런 '패거리 정치'경향을 보이지 않습니다. … 청년 여성의 정치적 특성을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페미니즘이라는 목적을 위해 우파와 손을 잡는다는 결단은 1970년대 우파 페미니스트의 출연에서도 볼 수 있다.
8) 2004년 KTX 여승무원 공개채용, 당시 1년 뒤 정규직 전환 약속, 지켜지지 않자 2006년 총파업, 복귀 거부 승무원 280명 해고통보, 1~2심 법원에서 승무원 측 손을 들어주었으나, 2015년 대법원에서 판결 번복 → 지급받은 월급(인당 8,640만원)을 도로 반환해야 하는 상황에 1명 자살, 2018년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과 박근혜 정부의 판결왜곡('사법교감') 정황 드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