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은데 뭘 쓸지는 모르겠어
레몬색에 가까운 아주 연한 연두색 물감에 물을 흠뻑 적신 붓을 콕 찍었다가, 팔레트 위에 다시 덜고, 색을 망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맑은 물을 더해 풀어낸 색을 새하얀 종이 위에 조심스레 툭툭 얹어낼 때의 순간을 떠올린다. 좋아하는 순간이다. 초록으로 가득 찬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 초록잎이 잔뜩 햇빛을 받아 레몬색으로 빛나는 부분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
완벽주의자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에 차지 않는 결과에 마음을 쓰고 연연하는 사람인 나는 글과 그림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다 보면 눈 앞에 선연히 보이는, 부족한 내가 만들어낸 부족한 결과. 그것을 대면하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괴로워서,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서서 주춤거리고 때로는 그 두려움에 져버리고 만다. 누가 검사하겠단 것도 아닌데, 그냥 내가 나를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을 뿐인데.
나는 어쩐지 엉성하고 빈틈이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의 특이한 취향이랍시고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실, 모두들 그런 사람을 좋아하니까. 완벽하지 않고, 혹시나 하는 헛된 기대인 줄 알면서도 그 기대를 품고 사는, 모든 걸 통제할 수 없어서 사람 같은 사람. 엉성하고 빈틈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단 말은 사실상 엉성하고 빈틈이 있는 부분을 어느 순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그 사람을 이루는 대부분의 알맹이가 치밀하고 단단한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말과도 같은 말이 아닐까. 누군가의 엉성한 빈틈을 발견하면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의 단단한 알맹이들을 구경하고 싶어 지니까, 빈틈은 매력적이다.
힙합 음악 가사 전체에 펀치라인만 있을 수 없고, 하이라이트만 있는 영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는데도 거창한 결과물만 보고 싶은 이 알량하고 얕은 심보까지 마주하고 나니 어쩐지 이제는 당장이라도 아무거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새싹처럼 연약한 의지가 피어오른다. 뭘 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