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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e Jul 18. 2020

내 관상이 어떻다고요?

(어제에 이어서 최종본입니다! 이어서 보실 분들은 조금 내리면 2부 있어용ㅎㅎ)



<1부>


오늘 새로 뜬 연예 뉴스는 뭘까, 오늘 인스타에는 누구 소식이 올라올까 하는 가벼운 생각들로 꽉 차 있던 내가 처음으로, 인생과 삶에 대해 눈물 쏙 빠지게 되돌아보게 만든 날이 있다. 오늘은 그 날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교까지는 좋은 직업을 가지기 위한 공부를 하느라 억지로 억지로 학업을 마쳤으니,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공부, 경제활동과 상관없이 배우고 싶은 학문을 고르는 설렘이 있었다. 나는 예술 분야의 대학원에 입학했고 예술 분야의 교수님들이 종종 그렇듯, 아주 특이한 교수님을 한 분 만났다. 실기 시간에는 검정 봉다리에서 막걸리를 꺼내 홀짝이며 작품을 봐주셨으니, 아주 특이하다는 형용사가 얼추 알맞을 것이다. 다행히 교수님은 나와 친구 무리들을 '잘은 못하지만 열심히 하는 기특한 것들'로 봐주셨고 우리는 교수님과 특별한 라포를 쌓아갔다. 그리고 어는 날에는 시골에 있는 교수님의 집에 초대를 해 주셨는데, 하필 그 날이 내 뇌리에 잊히지 않는 날이 되어버렸다.


그 날은 주말이었지만, 우리들은 주말에 교수님 댁에 가는 것을 과제처럼 느끼지는 않았다. 그만큼 서로 애정이 생긴 관계여서 거기서 먹을 주전부리를 고르는데 쓸데없이 진지할 만큼 들떠있었다. 교수님 댁은 경춘선 라인에 있었기에 그날 오전, 우리는 상*역에서 상봉하기로 했다. 먼저 도착해 상*역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어딘가 낯익은 뒤통수를 보았다. 그 뒤통수는 전철역 청소미화 복장을 하고서 쓰레기통을 집게로 쑤시고 있었다. 그 뒤통수는 나보다 10cm 정도 키가 작았고 나보다 10kg 정도 덜 나가 보였다. 그 뒤통수는 아주 가는 머리카락과 적은 숱을 달고 있었다. 그 뒤통수와 실루엣이 마치... 엄마 같았다. 뭐라고...?


그녀를 확인해봐야겠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어린이집 선생님이다. 오늘 아침에도 어린이집으로 출근한 그녀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런 복장으로 있을 리가 없다. 그녀 뒤에서 '엄마?' 하고 불러보던지, 그녀를 돌아 세워 얼굴을 확인했어야 했다. 그러려던 찰나, 친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영화 아니냐고? 나도 영화인 줄 알았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이 가능하다니. 아니, 영화였으면 차라리 좋았겠다.


사실, 그녀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 뒤통수만으로 그녀가 나의 엄마가 맞았다. 확실했다. 가녀린 숱을 가리기 위한 엄마만의 독특한 헤어 스타일링이 있다. 똑딱 핀 두 개를 X자로 겹쳐 꽂아 뽕을 한껏 살린 그 헤어 스타일은 엄마 뒤통수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본 일이 없다. 뽕을 살린 헤어스타일은 많지 않냐고 묻지 말라. 포인트는 뽕이 아니라 '똑딱 핀 두 개'다.


"엄마. 뽕을 살리는 건 좋은데, 핀 좀 예쁜 걸로 하면 안 돼? 똑딱 핀은 초등학생이나 하는 거잖아.. 엄마 나이에 맞게 예쁘고 고급진 거 사자."


"엄마가 다른 핀 안 해 봤겠니? 다 금방 부러져 못 써. 똑딱 핀 두 개가 최고야."


예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 대화만 안 했어도 오늘 본 그녀가 엄마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똑딱 핀 두 개'가 머릿속에 각인됐고, 그러니까 그녀는 엄마가 맞았다.


엄마가 청소일을 하다니. 청소일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옛날에 서울에서 최고가는 여대를 졸업하고 한때는 공무원이었고 원장이기도 했던 엄마가 청소일을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마치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충격과 불안과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다 안고 교수님 댁에 도착했다. 일단은 진정하자. 방금 일은 종이 접듯이 접어 주머니에 넣어놓자. 친구들과 교수님 앞에서 불안한 상태를 들키지 말자. 나머지는 집 가는 길에 생각하자. 가면과 연기에 능했던 나는 그 날, 누구보다 밝고 명랑하게 교수님 댁에서의 시간을 즐겼다.         





교수님은 우리를 위해 닭을 잡아 백숙을 고아주셨다. 귀하다는 도라지 구이도 해 주셨다. 건강에 좋다는 어떤 차도 마셨던 것 같다. 교수님은 막걸리를 드셨다. 거나하게 취하신 교수님은 새빨개진 얼굴로 갑자기 "관상 봐줄까?" 하셨다. 약간의 신기도 있고 이전에 공부한 적이 있어 사람을 잘 본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관건은, "내가 관상을 보고 나면 몸이 아파. 그만큼 얼추 맞혀."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은 '교수님이 정말로 관상을 볼 줄 아는구나. 영험한 기운을 느끼시는구나.' 하는 신뢰를 주었다. 관상에 자신이 없는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공짜로 고퀄리티의 관상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는 친구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교수님은 한 명 한 명의 관상을 보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동안 내 마음이 소란했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뭐라고 하실까? 혹시 나의 집안 사정을 다 꿰뚫고 공개해 버리는 거 아니야? 혹시 엄마 아빠 직업도 읽으시나? 아빠가 집 나간 것도 알게 되실까? 알더라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아야 하는데. 친구들 다 있는데...' 하는 사이에 내 차례가 왔다.


"너는... (한숨)... 열심히 살아라.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무너지지 말고. 열심히. 알았지?"


그게 다였다. 오늘 내가 목도한 엄마의 비극을 예언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 짧은 몇 마디에, 특히나 무너지지 말라는 말에 나는 무너졌다. 교수님은 나의 불우한 가정사를 다 읽으셨구나. 그러고서 집에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친구들과 헤어지고나서부터 눈물이 줄줄줄 흘렀고 아파트가 보이면서부터는 도저히 울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그대로 터트리며, 엉엉 소리 내어 울며 현관문을 열었던 기억이 난다.                   




<2부>


다 큰 여자애가 소리 내어 울면서 대문을 열어젖힌다. 놀란 엄마는 나를 달래기보단 화를 내면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서럽게 울며, 나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엄마는 교수님을 타박했다. "아니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애를 속상하게 해? 엄마가 전화해볼까?" 엄마는 교수님에게 적잖이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교수님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집이 문제다. 엄마가 문제였다.


엄마는 왜 이혼을 해서, 엄마는 왜 청소일을 해서, 잘 나가던 엄마가 왜 이렇게 고꾸라져서 그 애매모호한 관상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걸까. 우리 집이 멀쩡했어도, 청소일을 하던 엄마를 보지 않았어도, 그 관상을 듣고 마음이 무너졌을까. 관상이 문제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 집이었다.


모든 원망은 잘못이 없는 엄마에게로 향했다. 아빠를 원망했다면 좀 더 쉬웠을까. 불행히도 내 과녁엔 눈앞에 안 보이는 아빠 대신에 엄마가 걸렸다. 엄마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결혼을 잘못한 잘못이다. 그런 남자와 결혼한 엄마가 잘못이다. 그런 남자와 결혼해 애를 둘씩이나 낳은 엄마가 잘못이다. 애를 낳아놓고 이렇게 키우는 엄마가 잘못이다. 그 날, 열린 수도꼭지처럼 철철 흐르던 눈물의 의미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었다.


자존심이 세었던 나는 누군가의 동정을 받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교수님의 한숨과 목소리에는 동정이 짙게 묻어났고 나의 자존심을 살해했다. 열심히 공부한 이유, 좋은 직업을 가진 이유 모두 불우한 가정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나를 불쌍하게 보지 못하도록. 아무도 나를 딱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그런데 생을 바친 그 노력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단번에 내 과거를 꿰뚫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가면을 써도 써도 가릴 수 없는 내 본질 내 가족. 내가 일궈놓은 화려한 스펙을 단번에 어둠으로 물들이는 그것들. 아무리 해도 숨길 수 없는 그것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날부로 나의 삶의 길이 끊겼다.


그 날은 정말 많이 울었고, 그 후로 많이 방황했다. 엄마에게 더 이상 친절할 수 없었다. 마음껏 엄마를 원망했고 힐난했다. 나를 왜 낳았냐고, 원치 않는데 도대체 왜 낳았냐고, 이제 그만 죽어서 쉬고 싶다고 엄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열심히 살면 무슨 소용이냐고, 내가 아무리 잘나 봤자 남들은 청소 일하는 엄마를 둔 나를 불쌍하게만 본다고, 어디 가서 말도 못 한다고, 나는 엄마가 부끄럽다고. 그렇게 약 2년을 엄마는 지옥 속에서 살았을 거다.




그 속에서 2년을 버틴 엄마도, 2년 '씩이나' 지치지 않고 엄마를 괴롭힌 나도 대단하다. 갈피를 못 잡던 나는 2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변했다. 일단 엄마에 대한 원망을 거두었다.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겠다, 모든 게 우연의 장난이었겠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숨기니까 더 아픈 지난날이었다. 조금씩 드러내 놓으니 숨통이 좀 트인다. 어쩌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에 '가족'이 등장하면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도 있게 되었다.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그동안 좀 힘들게 살았다고. 그리고 브런치에 모든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불우하게만 보였던 나 스스로가 조금은 기특하게 여겨지기도 하더라. 메마른 환경에서 꽃 피우기까지 정말 고생했다 나 자신아. 너 정말 대단한 인간이구나. 그렇게 나와 가족, 과거와 가난을 인정하기 시작하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


30에 접어드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40살 분량 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아직도 할 말도 에피소드도 많다. 오늘은 나이 70이 되어도 서슬 퍼렇도록 생생하게 기억될 날을 풀어보았다. 다음에 언젠가는 '원망 투성이'였던 내가 어떻게, 비로소 그것들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풀어적을 수 있으면 좋겠다. 눈물 글썽이며 글을 적을 때와 달리, 글을 다 적고 발행하고 내 글을 여러 번 읽다 보면 눈물 없이 읽을 수 있는 날도 오더라. 나에겐 이것이 치유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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