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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e Aug 15. 2020

갑자기 엄마가 변했다.

나는 비즈니스 딸이었다.

엄마에 대한 감정이 사뭇 애틋하고 남다른 요즘이다. 원래도 예쁘던 엄마 얼굴이 더 예뻐 보이고, 오동통 살도 좀 오른 것 같고, 그래서 그런지 주름도 펴져 보이고, 얼굴도 뽀얀 보름달 마냥 좋아 보인다. 엄마를 보는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왜냐고? 엄마가 좀 변했기 때문이다.


"아유 우리 딸 덕분에 엄마가 이런 일도 해보네. 고마워 우리 딸~"

"이번 휴가에는 우리 딸, 뭐를 맛있게 해서 잘 먹여야 하나? 그동안 항상 엄마가 일찍 나가서 밥도 잘 못 챙겨 먹었지? 이번 휴가에는 엄마가 먹을 것 잘 챙겨 줄게."

"우리 딸, 왜 그렇게 불안해해. 불안할 것 하나 없어. 다 해결하면 되고 엄마가 도와주면 되는데 왜. 안심해도 돼. 마음 편히 먹어."


그동안 남동생을 향했던 이런 종류의 말들이 내게로도 향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이게 봄바람이었구나.




아빠가 제 역할을 포기한 이후로 엄마는 남동생을 과도하게 걱정했다. 뭐든 듬직하게 척척 해나가는 나와 달리, 동생의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리라. 장녀의 넓은 이해심을 십분 발휘해 엄마의 온 관심을 동생에게 쏟아도 좋다고 나 또한 용인했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동생만 잘 챙기라고. 나는 알아서 잘하지 않냐고. 나를 너무 믿어버린 나머지 엄마는 정말 '온 관심'을 동생에게만 쏟아왔다.


가장 기억에 남고 서운한 일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다. 고3인 나는 집에 유일하게 있던 방 한 칸을 남동생에게 양보했었고 내 책상이 없어 동생 책상을 빌려 썼었다. 그런 나의 고충을 이해한 듯이, 어느 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가구점으로 향했다. 여러 가지 책상을 둘러봤다. '드디어 나도 내 책상이 생기는구나!'하고 설레는 마음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엄마가 둘러보는 책상이 '동생의 책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마음이 총을 맞고 난 후였다. "엄마, 나는? 내 책상은? 걔는 책상 있잖아." 하고 따져 물으니 들려오는 엄마의 대답. "네 동생이 하도 집에 마음을 못 붙이는 것 같아서. 책상이라도 새 거 사주면 집에 좀 붙어있을까 싶어..." 그 날, 다행히 책상을 사지는 않았지만 나는 억울함을 잔뜩 얻어왔다. '나도 자식인데. 나는 책상 없는데. 나도 엇나가야 하나? 그래야 내 책상에서 공부할 수 있는 건가?' 하는 꼬인 마음까지도 잔뜩 내 몫이었다. 그 후로도 동생과 나에 대한 엄마의 차별 대우는 알게 모르게 계속됐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사소하지 않은 일까지.


왜 동생에게만 좋은 것 해주냐고 따져본 날도 있었다. 엄마는 "동생이 잘 커야 나중에 네가 고생 안 해. 동생이 망나니 되면 나중에 너 괴롭혀. 다 너 편하게 살라고 그러는 거야." 했다. 알 것 같으면서도 괜히 반발하게 되는 마음. 같은 여자이면서 어떻게 이러나 하는 생각들 끝에는 '이제 엄마한테 잘해주지 말아야지. 잘해 줘 봤자 동생만 좋은데 뭐.' 하는 생각이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고 나니 유독 엄마 앞에서만 계산기를 두드리는 내가 남았다. 엄마가 이만큼 잘해주면 나도 이만큼. 엄마가 이만큼 못 해주면 나도 이만큼. 엄마가 얼마를 꾸어가면 이자까지 제대로. 그리고 점점 정 떼기. 가장 비즈니스적이지 말아야 할 관계가 가장 비즈니스적으로 바뀐지도 참 오래됐다.


그렇게 내가 누구에게 보다도 계산적으로 굴었던 엄마가 요즘 나를 동생으로 착각하나 보다. 집에 오면 환한 미소와 따뜻한 말씨,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마음씨를 장착해서 대해준다. 이쯤 와서는 헷갈린다. 엄마가 변한 건가? 아님 내가 이상해 진건가? 엄마가 변한 거라면, 갑자기 왜? 엄마에게 변화의 동기는 없다. 요즘 변화의 파도를 타고 울렁울렁 하는 건 엄마가 아니라 나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니라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해서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이제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발견한 것이 엄마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엄마의 '원래' 모습을 이제야 제대로 '발견'한 것일지도.

어쩌면 엄마는 동생에게만큼 나에게도, 예전부터 이렇게 따뜻했던 것은 아닐까.

그 마음을 내가 이제야 발견한 것이라면...?




약 두 달 전부터 시작된 인생에서의 가장 큰 변화. 나는 아픔을 까발리기 시작했다. 가장 아픈 기억들을 들춰 눈물과 함께 활자로 부활시켰다. 처음에는 썩어가는 찐득한 고름을 몸에서 빼낼 때와 같은 통쾌함과 시원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아픔을 까발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고름을 짜내는 일은 너무 아팠고 새살은 생각보다 더디게 돋아났다. 결국에는 아프기만 한 일인가. 그렇게 나는 치유와 멀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아픔 속을 잠수하다가 문득, 아픔을 까발리는 것의 의미를 다시 짚어본다. 아픔을 공개하는 목적은 나를 긍정하기 위함이다. 이런 아픔이 있었지만 잘 헤쳐왔다고. 이제는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내가 잘못한 게 없지 않냐고. 그 와중에 우리 정말 잘 해오지 않았냐고. 결국은 스스로에게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 첫걸음이 가면을 벗게 만들고 아픔을 남김없이 까발리게 만들었다.


둘째 걸음을 걸으려고 보니 잠깐 지쳤다. 처음 해보는 일은 큰 에너지를 동반하는 법이라. 얼마간 쉬었으니 이제 둘째 걸음을 디딜 때가 왔다. 나의 둘째 걸음은 아픔에만 매몰되고 원망에 집착하지 않으련다. 원망하는 일은 전혀 속 시원한 일이 아니었다. 원망하는 마음은 나의 부족함을 질책하게만 만들었다. 원망하는 일은 내가 받은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시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원망하는 일은... 결국 아팠다. 이제 아픔과 원망은 바람에 날리고, 둘째 걸음은 치유에 집중하는 발자취로 만들련다. 그래야지 내가 살겠다.


치유에 집중하고자 하니 이제야 보이는 것들.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구나. 엄마도 동생도 같은 피해자였구나. 우리는 같은 편이었구나. 각자의 아픔이 있었구나. 모두 함께 짐을 지고 있었구나. 내가 그 짐에 밟혀 죽지 않게 하려고 두 사람의 어깨도 무거웠겠구나. 실은 엄마의 어깨가 주저앉았겠구나. 그토록 가녀리고 연약한 어깨가...


내가 가장 원망하던 대상이, 나를 살리고 있었다는 깨달음. 

내가 애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대상이, 나를 세상에서 가장 애정하고 있었다는 깨달음.

내가 요만큼도 손해보지 않으려고 계산기를 두드렸던 대상이, 내게 주고 싶어 일생을 아끼고 살아왔다는 깨달음.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는 조금씩 치유의 집을 지어온 게 아닐까. 앞에서는 나의 원망과 계산과 비수를 맞으며 등 뒤로는 치유의 벽돌을 쌓아 올렸다. 엄마를 긍정할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동생에게 차별받는다고 생각했던 내게, 알고 보니 동생보다 더 많이 받아온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편안한 그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저녁도 굶으면서 딸내미가 좋아할 간식거리를 사들고 들어오는 가벼운 발걸음이 떠오르지 않았더라면... 내가 감히 치유라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엄마의 희생은 치유의 충분한 동기가 됐다. 더 이상 아파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괴로울 이유도 없다. 나에겐 이런 엄마가 있는걸. 이런 엄마가 지어준 치유의 집도 있는걸. 나는 엄마가 지어준 포근하고 아늑한 치유의 집에 잘 도달했다. 문을 닫는다. 문 밖에서 몰아치던 폭풍우 소리가 멀어진다. 안도한다. 잊고 있던 온기. 이게 봄바람이었구나.


나의 치유는 엄마에게도 치유가 될 것이다. 내 아픔에만 집중해 엄마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내 아픔과 함께 엄마의 아픔도 살필 수 있도록. '나 많이 아팠어' 끝에 '엄마도 많이 힘들었지?' 할 수 있도록. 언젠가 엄마에게 '엄마의 상처를 치유하는데만 집중해' 하고 말할 수 있도록. 동생에게 '너 힘들었던 거 다 털어내' 하고 아픔을 나눠질 수 있도록. 내 두 번째 발걸음이 모두에게 따스한 발자취가 되기를 바란다. 나도 엄마도 동생도 치유받는 두 번째 발걸음이 되기를.




엄마. 너무 오랫동안 엄마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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