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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Mar 21. 2024

142

3.21

시끄러운 고독 



어설프게 착한 인간은 일찍 죽는다. 보통의 인간에게 착취당해 죽는다. 항상 선하려고 애쓸 때의 그 버둥거림. 아, 가련하다. 반드시 끼어있는 악한 인간에게 파멸당하리라. 어설픈 낙관보다 확실한 냉소가 평온인 거야. 내 안의 구원자가 속삭였다. 인간은 수시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동경하고 환상적으로 여기고. 그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비교하고 충돌시킨다. 망가트리고 붕괴시킨다. 무지는 저질러진다. 상상함으로써 용기를 얻지 못하고 되려 비겁해진다. 비겁해짐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몰락한다. 그래 불쌍하게도 인간의 일일은 하릴없지. 늘 자기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를 신경 쓰다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모든 마음은 질병이 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괜찮은 색깔을 입고 다니다가 분리불안을 얻는다. 그곳에서는 피해의식이라는 암덩이가 증식하고. 그 괴로움은 공허함이다. 거기서 시작되는 경멸은 부조리의 일부. 그러므로 점잔 떠는 척하는 건 얼마나 추한 위선인가. 그 모습은 차라리 제대로 진상을 떠는 자들보다 더 바라보기가 힘들다. 아아, 자기 자신을 설명한다는 건 얼마나 초라한 일인가.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마구 설명한다는 건 나를 더 고달프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럴 바에야 즐거운 농담이나 하는 게 낫다. 백번 생각해도 그렇다.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인간과 소통하려는 속셈은 어리석은 허영일 뿐이었다. 타인이 나를 해결해 준다는 믿음은 얼마나 피폐한가. 인간이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해결되지 않는다. 애초에 문제가 아니었거나. 사노라면 서서히 옅어지는 것들일 뿐. 감정의 동화나 위로를 바라며 인간과 소통한다는 건 참 치욕스럽지. 그것은 그저 패배감만 유발할 뿐이다. 목적성이 있는 소통은 결과적으로 나를 좀먹었다. 나는 타인에게 도대체 무엇을 바랐던가. 구원인가 해방인가. 아아, 착잡하고 부끄럽다. 나는 나를 절벽으로 내모느라 혈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똥보다 말에서 더 냄새가 난다. 근심 걱정은 그날의 절망을 감추기 위해서 정신이 궁리해 낸 일종의 안식처다. 스스로 혼란을 선택함으로써 위안을 얻기도 하는 게 인간이니까. 그런가 하면 나는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살아갔다. 느리게 가는 시간의 한가운데서. 늪에서 발작하면서.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혐오의 일부가 되어 살았다. 우울과 상실과 함께 놀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사위에 벽을 친다. 그곳에서 증오감을 느끼고 자학을 즐긴다. 아아, 가련해라 가련해. 시간은 나를 관통해 갔다. 빛은 사라지고 어둠은 짙어지기만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평생 불안감의 안대를 쓰고. 낯선 무대 위에서 언젠가 걷힐 장막을 기다린다.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숨죽인 채. 그러다 자신의 차례가 됐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빛이 이끄는 쪽으로 미친 듯 막춤을 추는 존재. 사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이므로 특별히 더 고통스러울 일이 없다. 그리고 의심. 그러나 지금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므로 역시 삶은 버티는 것 외에 아무 방도가 없다. 그리고 충돌.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인간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마침내 귀결. 절망과 희망은 같다. 그리하여 축복하리라. 이 호젓한 권태를, 지나치게 슬픈 이 영혼의 비애를.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비를 기다린다. 밖과 안이 한꺼번에 부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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