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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May 06. 2024

149

5.6

회색빛 하늘 아래


오늘 우중충하고 서늘하다. 하늘은 허탈한 회색빛. 구름과 해는 묻혀있다. 익숙하고 나쁘지 않다. 조금 추워 옷을 껴 입었다. 추운 회색빛의 날, 하늘은 낮아진다. 곧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이것은 결코 추상적 비유가 아니다. 인간의 정서는 날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인간은 결국 ‘무언가’에 굴종할 수밖에 없으며, 날씨가 이 ‘무언가’의 아주 일상적인 상황 중 하나인 것이다. 서서히 낮아지는 하늘. 정서의 적막과 추락을 동시에 의미하는. 그러나 이 상황에 너무도 길들여져 있음으로 아무것도 새삼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날씨는 부조리하다. 예감하고 예보하는 능력이 삶을 권태의 하늘 아래 있게 한다. 이런 하늘에는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없다. 본능적인 공포를 감지한 것처럼. 그 아래서, 나는 걷는다. 인간이자 미물인 내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 두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는 것. 짓눌려오는 운명의 중력을 견디며 나아간다. 모든 것의 답이 거기 있고, 모든 지옥도 거기 있다. 길은 삶이며 지옥이고, 굴종이자 자유다. 그러므로 통과해야 한다. 창백한 몰골을 하고 흰 빛을 향해.

오늘 나는 성실하지 않다. 완전히 텅 비어 있다. 걷고 있음이 분명한 지 알 수 없고, 내가 디딘 이곳이 길인지 황량한 황무지인지 알 수 없다. 의식과 감각이 분리되어 저 먼 하늘로 솟는다. 나는 텅 빈 채 걷는다. 빗물이 쓸고 간 대지는 아직 미끌거렸다. 점점 시각이라는 감각이 퇴화하는 듯하다. 모든 것이 흐릿하다. 간신히 청각만 살아 있다. 청각은 죽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다. 

내면의 외침과 외부의 세계가 뒤섞인다. 세계는 잡음으로 가득하다. 

시끄러운 소리들. 어디서 들려오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시끄러웠나. 왜 내가 시끄럽게 듣고 있는가. 왜 얇고 촘촘한 신경은 좀체 무뎌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가. 그만 죽고 싶은가. 죽이고 싶은가. 죽임 당하고 싶은가. 용기 없이 생각만 한다. 추하다. 생각 속에 빠져 죽는다. 적의가 들끓는 중인가. 무엇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시끄러운 소리들.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가. 다가오지 마라.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다르게 사는 방법이 무엇이었나. 시끄러운 소리들. 찢어지는 공간들. 귓속이 파 먹힌다. 나는 도대체 무얼 듣고 있는 것인가. 혼자 살고 싶다. 같이 살고 싶다. 홀로 죽고 싶다. 함께 늙고 싶다. 잘 살고 싶다. 행복하게. 평화롭게. 사랑하면서. 그렇게. 무력한 외침들. 우짖는 인간들이 다가온다. 그래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다. 세계가 다가온다. 음침하고 처연하게. 뒤꿈치를 질질 끌고 온다. 듣고 싶지 않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살아있는 것인가.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도처의 비명들. 구원 못할 요동들. 다가온다. 제발 누가 저 입 좀 막아줘. 누가 이 귀 좀 잘라줘......

나는 세상을 듣지 못한다. 나는 저 가로수 아래를 지나는 미숙한 청년의 낮과 밤을 모른다. 감각이 세상을 능멸한다. 

나에게 감각은 심연이다. 고로 사라져 버린다. 세계는 들끓는 허구의 시궁창이다. 나는 수시로 내가 되거나 아무도 아닌 무엇이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나에게 익명의 이름으로 온갖 추잡한 진실과 허영을 남발하는 자이며, 동시에 신실한 지혜와 온정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는 자이다. 나는 나의 악이자 성인이며, 추앙하는 자이며 그러므로 추방되는 자이다. 모호한 잔상에 기대 버둥거림을 반복하고, 비로소 지은 웃음에 찬란은 찾아볼 수 없으며, 도리어 은닉된 생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우는, 그저 열심히 끝장나고 있는 조용한 고립자이다. 나는 스스로 감옥을 짓고 영원히 투옥된다. 그 속에서 그저 풍화가 풍경이 되기까지 바라본다. 음침이 외침이 되기까지 듣는다.  

저녁이 여위어간다. 길목 곳곳에 드문드문 푸르스름한 기운이 내려앉아 있다. 대조적인 것들이 슬프고 아름다웠던 날들이 그리워지는, 그러나 언어의 바깥에 닿지 못하고 뻐끔거리며 숨을 뱉다 조용히 몸을 숨기러 돌아가는, 검푸른 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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