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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대훈 May 13. 2024

150

5.13

견딜만한 재앙


  

눈이 떠진다. 앞이 보인다. 의식이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몸이 먼저 느껴지고, 정신이 그 뒤를 따라온다. 몸은 무시한다. 오래된 불경한 습관이다. 그보다는 정신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정신을 살펴본다. 어지럽다. 그렇다고 어쩔 수는 없다. 다만 어지럽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둔다. 그다음 순서가 몸이다. 정신을 인식하자마자 몸이 반응한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느낌이다. 방광이 터질 듯했다. 그 외 별것 없다. 그 즉시 하루는 시작된다. 화장실을 다녀와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숨이 들이마시고 내쉰다. 무망 속에 있다. 가느다란 실빛이 구름 사이로 빠져나와 있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저기 가고 싶다...... 고 생각하다가, 길 위에서 담배를 마저 피운다. 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삶은 땅에 박힌 재앙이다. 견딜만한 재앙.  


집으로 돌아와 커피와 차 중 무엇을 내릴지 선택한다. 선택은 심연이다. 다만 아주 일상적인 심연이라 크게 대수롭지 않을 뿐이다. 아무래도 씁쓸한 게 끌려 커피를 내렸다. 집안은 한산한다. 커피를 들고 거실에 망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한다. 작은 플랑크톤 것들이 흐느적거린다. 눈을 몇 번 깜빡인다. 더 많아진다. 눈을 비빈다. 시야가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지지직거린다. 다행히 플랑크톤들은 사라졌다. 이윽고 신호가 울린다. 어서 빨리 무언가를 집어넣으라는 신호. 그래, 굶주림이라는 생명의 신호가 울린다. 무시할 수 없는 슬픔의 요동이다. 그 즉시 삐-소리가 귓속을 관통한다. 송곳처럼 꿰뚫는 그 소리. 무의식에 구멍을 뚫는 소리.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자각한다. 그러나 어찌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알아차림과 반복만 있다. 채움과 상실의 반복. 지긋지긋하고 익숙하다. 손가락을 구부려 관자놀이를 몇 번 문지른다. 나름 괜찮은 처방이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다시 닫는다. 선반에 놓인 신라면 건면을 하나 끓인다. 무표정으로 라면을 먹는다.  


밖으로 나가니 역겹다.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자동차 두 대가 길목에 엇갈려 서 있다. 차 주인들이 내려 서로 욕을 퍼붓고 있다. 머릿속에 물음이 가득 찬다. 왜 인간은 운전을 하며 자주 싸우는가? 운전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인가? 왜 운전과 본성은 서로 연관되는가? 운전이라는 행위가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인가? 그러기에 더 예민해지는 것인가? 일종의 보호본능인가? 방어태세인가? 물려 죽기 전에 먼저 물어 죽이자는 심리인가? 자동차라는 공간이 익명성을 보장하기에 그런가? 그러므로 더욱 침해받기를 싫어하는 심리인가? 그 익명성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마구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인가? 그러므로 폭력성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인가? 아니 그냥 단순히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인가? 관대함과 인내의 상실인가? 아니 여유의 상실인가? 여유는 자본에서 나오는가 지혜에서 나오는가...... 결론적으로 인간은 왜 서로 싸우는가? 상대방이 자신의 처지를 더 알아주기를 바라기 때문인가? 헤아리고 자각하는 능력 부족인가? 그냥 다 외롭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무튼 인간은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평생. 


한차례 소란이 가고 다시금 고요를 더듬거린다. 눈을 감고 심장 박동 소리를 들어보려 한다. 심호흡을 한다. 묵은 독기가 새어 나온다. 불완전한 실존이다. 여기서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 이대로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으리라. 불완전 속에서 나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 불완전하다는 상태가 그 자체로 존속되기 위해 더 버티는 것. 그 결실의 반복 말고는 아무 도리가 없다. 어둠 속에는 항상 더 짙고 어두운 무언가가 있다. 그 어둠은 권태라는 이름을 하고서, 나를 산 채로 잡아먹는다. 나는 순순히 먹힌다. 먹힌 다음 버틴다. 벽에 기대에 버티고, 허공을 통과하며 버티고, 풍덩 빠진 채로 버틴다.  


밤에는 천변을 걷는다. 가끔 달리기도 한다. 밤이 되면 하릴없이 천변에 나가야 한다. 밤에는 내가 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어둠은 솔직한 얼굴을 낱낱이 드러내 버린다. 하루 동안 묻혀온 얼룩이 보이고 악취가 코를 찌른다. 모든, 정신적 관념적, 신경적 육체적 작동이 느려진 후에야, 구석진 곳에 쓸어있는 녹이 보이고 비릿한 쇠 냄새를 맡게 된다. 방구석에서는 이 들끓는 난장판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 나무와 흙, 돌과 강물이 흐르는 그곳에서 나는 더러운 나를 씻는다. 그리고 조금 뛴다. 삽시간에 뻑뻑해지는 두 다리. 쿵쿵 박동하는 심장을 느낀다. 순수한 실감이다. 평소 나는 내 심장의 박동을 순수하게 느낄 수가 없다. 심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어렴풋하게 알 뿐, 그러나 살아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살아있음을 알려면 충격을 줘야 했다. 고통이 있어야 했다. 뻑뻑해지는 두 다리와 헐떡이는 호흡이 있어야 했다. 정직하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 삶의 질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추 달리고 천천히 걷는다. 땀이 식어 겉이 차갑고 안은 뜨겁다. 이 순간 나는 완전하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매일 죽는다. 그리고 매일 탄생한다. 내가 얻는 유일한 것은 줄어든 하루다. 삶은 살 수록 줄어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삶이며 아무것도 삶이 아니다. 삶과 죽음 모두 이곳에 실존한다. 모든 내일은 무지 속에 있다. 무지 속에 기적이 있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심신을 가지런히 하고 어둠 속에 나를 놓는다. 늘 수심에 가득 차 과장된 상상을 해서 스스로 불행의 묘를 파는 게 인간의 운명. 상상함으로써 비겁해지는 게 인간의 운명. 그러나 그 무엇도 확실치 않다는 게 인간의 희망. 자유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질문을 계속 시도하는 게 인간의 희망. 어디까지, 언제까지 나아갈 나를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떨어트리면서. 착실하게 눈을 뜨고 굶주림을 달랜다. 기꺼이 움직이고 심신의 전원을 끈다. 


환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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