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만큼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미술관에서 근사한 작품을 만나면 모르는 옆 사람에게 자꾸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가슴 한켠에 차곡차곡 쌓이는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 혼잣말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글을 이곳에 풀어 놓습니다.
앞으로 제주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표현하는 예술 작품과 작가를 소개할 텐데요. 세 번째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나만의 유토피아를 그려내는 김현숙 작가의 작업입니다.
며칠 전 친구의 생일에 프리지아 한 다발을 선물했습니다. 시절이 좋아 몇 번의 클릭으로 꽃과 함께 축하하는 마음까지 보낼 수 있었어요. 꽃을 선물한 이유에는 웬만한 것은 전부 갖고 있는 사람인 점도 한 몫 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꽃을 기꺼이 옆에 두고 즐거워할 줄 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착하자마자 화병에 꽂은 '인증샷'을 보내며 기뻐하는 모습에 저 또한 입가에 미소가 걸렸습니다.
나의 세계를 아름답고 효과적으로 완성하는데 꽃만한 것이 없는데요. 한없이 무용하지만 한길 속도 모르는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함이 있습니다. 마치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햇빛처럼 말이지요. 오늘 소개하는 김현숙 작가의 주된 소재도 '꽃'을 비롯한 자연입니다.
30년이 넘게 꾸준히 꽃을 그려온 김현숙 작가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화가가 되었습니다. 지역미술의 대가로 인정받아 제주도립미술관장을 지내기도 했지요. 한국화를 전공한 뒤 1993년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16회의 개인전과 더불어 460여회의 국내외 초대전과 단체전으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김현숙 작가와 꽃의 인연은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천혜의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제주. 어린 소녀는 항상 꽃밭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궃은 일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풀·꽃과의 사랑에 흠뻑 빠졌습니다. 이는 무의식에 좋은 기억으로 자리잡아 기나긴 작품 활동의 모티브가 되어 주었지요. 자랄만한 토양이 아닌 곳에서도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생명의 경이로움도 그를 꽃의 화가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씨름 중인 작업실에서 창 밖 담장 금이 간 벽 틈으로 피워 낸 꽃을 보며 나의 꽃은 언제쯤 스스로 화사하게 피어날지 고대해본다.
-김현숙 작가 인터뷰-
몇십년 동안 하나의 소재를 그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작가도 사람인지라 당연히 질릴 때도, 다른 소재를 기웃거릴 때도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어디에나 있던 꽃과 자연을 가족처럼 진심으로 사랑하는 천상 제주 사람의 면모에 뭉클해집니다. 제주에서 3년밖에 살지 못한 저는 이런 역사가 부럽습니다.
삼성혈이나 탑동 바다처럼, 제주는 도심에도 가까운 곳에 자연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서귀포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는 날 것의 자연에 온전히 정붙이기도 전에 비행기를 타고 떠나와 버렸습니다. 어느새 신도시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자연, 가지런히 심긴 풀과 나무의 아파트 조경이나 공원 등에 익숙해졌지요. 가까이 오래 두고 여러 모습을 관찰하며 애정을 듬뿍 담아 재해석한 김현숙 작가의 그림 속 자연이 애틋하고 귀한 이유입니다.
아울러 김현숙 작가는 제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해 '화초에 물 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과도한 물 주기로 화초가 죽어가듯 나의 작업도 적당한 선에서 붓질을 멈추지 않으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럼요,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렵지요. 저는 노는 데 진심이라 언제 갈 지 모르는 장소도 일단 ‘저장’ 버튼을 누르곤 하는데요. 팟캐스트 채널 여둘톡에서 에세이스트 김선우 작가가 해외의 유명 맛집을 북마크 해두는 것이 취미라고, 일단 그곳에 가서 알아보면 그땐 늦는다고 웃으며 말할 때 크게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일도, 집안일도, 아이 교육도, 노는 것도 모두 잘해내고 싶은 마음을 풍선처럼 부풀리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믿으며 매달 허들 경기를 치르고 있는데요. 혼자 멈추기 힘들어 배우자가 옆에서 가끔 터질 것 같은 풍선 같은 저를 바늘로 찔러주고 있습니다. 하루는 정말이지… 24시간입니다. 나의 집중력 은행의 잔고를 의식하며 적당한 선에서 붓질을 멈추는 것. 과한 욕심을 내려놓는 과유불급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로 그림의 완성도와 마음의 평화 지수를 높여줍니다.
김현숙 작가의 작품은 점·선·면 세 가지 조형 요소 중에서도 선과 면으로 주로 이루어졌는데요. 그 중에서도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것은 그림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흔한 검정이 아닌 각기 다른 뚜렷한 색으로 표현된 선입니다.
선의 색이 달라지면 다소 흔할 수 있는 꽃이라는 소재도 독특하게 변화합니다. 선의 색만 달라져도 이미지가 얼마나 달라지는지에 대한 신기함을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 감각적인 비밀을 한 가지 더 알려드릴게요.
보통 화면이 빽빽하기만 하면 평범해지고 재미없기 쉽습니다. 일명 ‘숨구멍’이 없을 때인데요. 김현숙 작가의 그림은 촘촘한 터치와 시원한 평면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었어요. 그 중에서도 평면 면적은 아예 단순화시켜서 우리 눈에 더 잘 들어오게 합니다.
이밖에 바탕이 되는 밑그림은 배채 기법(背彩技法)으로 여백과 색채를 적절히 배어나오게 해 꽃밭을 변화무쌍하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렇듯 실제 나뭇잎의 면을 닮은 부분과, 색종이마냥 고르게 색칠된 부분이 만나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김현숙 작가는 발묵(潑墨)과 농묵(濃墨)을 사용해 묘사와 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목탄·파스텔 콘테·분채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 포인트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수줍은 색과 강렬하고 과감한 색이 서로 대비되며 그림이 풍기는 이미지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종이에 진하게 녹아든 꽃은 우리 마음에도 선명한 인상을 남깁니다.
작가는 매화, 유채, 벚꽃과 같이 정확한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익명의 꽃을 그립니다. 그래서 월간 미술세계의 김상철님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익명의 정원’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어요. 그는 “객관적인 생태의 모습을 제거하고 관념의 주관으로 재구성한 자신만의 자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현숙 작가님 또한 '나의 꽃은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 사실성은 창조적 변형을 거친 새로운 사실이 된다. 자연 그대로의 꽃이 아닌 기억과 감정에 의해 재구성된 꽃으로 표현된다.'고 밝혔는데요. 이처럼 김현숙 작가의 꽃밭은 진짜이기도, 혹은 아니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원하는 가장 예쁜 모습으로, 결국 가닿아 사뿐히 앉아있고 싶은 그 광경을 그대로 그려냅니다. 자연을 재해석해서 말이지요.
현실과 비현실, 그 경계에서 내가 보고싶은 봄 풍경은 무엇일까요? 현실이 봄날같지 않아도,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늘 '00의 봄'을 꿈꿉니다. 김현숙 작가의 화폭에서 여러분의 그림은 어떤 빛깔,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을지 그려 보세요- 언제, 누구, 어디를 담을지는 오롯이 나의 즐거운 상상이자 선택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꽃이 피었다.
아! 봄
새해에 품었던 계획들이 아스라해질 즈음
어김없이 봄이 찾아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우리를 다독였는데 꽃구경도 말라한다.
내년에는 두 배로 너희를 볼 것이다.
-김현숙 작가 <화란춘성-침묵하는 봄> 도록-
김현숙 작가의 다짐은 코로나가 희미해진 지금 이루어졌을까요?
나의 세계를 아름답게 가꾸어가며, 늦은 봄놀이를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챙기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각예술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정성껏 끓인 죽에 참기름을 한 숟갈 넣었을 때, 밍밍한 국물에 간장을 두 방울 떨어뜨렸을 때 맛이 확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이토록 좋은 것, 혼자 보기 아까워 인터넷 골목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비바 아르떼(예술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