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단정한 그림, 동전의 양면같은 매력까지 지니다.
미술관에서 근사한 작품을 만나면 모르는 옆 사람에게 자꾸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가슴 한켠에 차곡차곡 쌓이는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 혼잣말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글을 이곳에 풀어 놓습니다.
앞으로 제주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표현하는 예술 작품과 작가를 소개할 텐데요. 두 번째는 겉과 속이 다른(?) 그림을 그리는 김보희 작가의 작업입니다.
“제주의 예술은 자연인 것 같아요. 마음먹고 자연을 즐기러 제주에 오시는 분이 많죠. 당연히 미술관보다는 자연을 보러 가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곳 미술관의 경쟁 상대는 자연이에요. 날씨가 좋으면 관람객을 산과 바다에 뺏기죠. 비가 오는 날이면 관람객이 증가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곳으로 제주의 미술관을 추천하거나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아요. 자연과 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여행이 가능한 곳입니다. 그래서 내부의 시선으로도 ‘제주의 예술은 자연이 맞다’에 한 표를 던질게요.”
잡지 노블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나연 전 제주도립미술관장이 말한 것처럼, 제주의 예술은 자연이 맞습니다. 그리고 제주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도 예술이고요. 이번에 소개하는 김보희 작가도 화폭에 싱그러운 풀내음과 바다 짠내를 담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한 김보희 작가는 2000년대 중반 제주로 이주해 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2022년에는 제주현대미술관에서 미디어아트 공간을 포함한 대규모 개인전을 열기도 했고요. 2020년 금호미술관 개인전에는 그림을 보려는 사람이 평소의 10배 가량 몰리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답니다.
김보희 작가는 제주 풍경을 그립니다. 곧은 수평선과 끝을 모르고 뻗은 야자수, 울창한 숲 등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는 제주 중문에 위치한 집과 정원 등 지천에 널린 자연 풍경입니다.
서울대 미학과 김진엽 교수가 쓴 책 예술에 대한 8가지 답변의 역사에 따르면, 우리가 보편적으로 초록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프리카 대초원 지역이 원시인류에게 가장 적절한 주거 지역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추측이 있습니다. 주거지 마련이라는 생존 전략의 하나로 색채 감각이 계발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요.
김보희 작가 또한 제주에 내려와 초록색에 홀딱 반했다고 하는데요. 간혹 푸른색에 잠시 자리를 내어주기도 하지만, 작품 속에 꾸준하고 성실하게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로 넘실대는 초록색입니다. 초록색은 따뜻한 노란색과 차가운 파란색을 섞으면 만들어지지요. 두 가지 매력을 모두 품은 컬러입니다.
아울러 그의 작업이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양면성을 보인다는 점까지 알아차린 뒤 저는 오래 전 알고 지냈던 여자 친구 한 명이 떠올랐습니다.
새침하고 차가웠던,
허나 정많았던 그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
중학교 3학년 때 뒷자리에 헤르미온느가 있었습니다. 이름 순으로 앉던 시절이라 같은 박씨인 그녀와 저는 1년 내내 나란히 앞뒤에 앉았는데요. 그래서 언제나 제가 앞에서 열심히 종이를 넘겼었습니다. 후에 명문 외고에 진학할 만큼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였는데, 언제나 턱을 괴고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을 철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습니다.
겉모습은 그 사람의 일부를 반영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면만 있지도 않지요. 운동은 거의 안하지만 부지런히 1일 1맛집을 탐색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에요!) 그는 게으르면서 동시에 부지런한 사람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친구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책을 읽고 있던 아이였지만, 일년 내내 앞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며 푼수처럼 마음을 열어 젖히는 저에겐 조금씩 곁을 내어 주었습니다. 무엇이든 어렵게 얻은 것이 더 귀하지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게 슬쩍 보여주던 친구의 미소와 속마음에 신났던 기억이 희미하고도 또렷합니다.
김보희 작가의 그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포근해 보이면서 동시에 서늘한 구석이 있지요. 저는 김보희 작가의 작업에서 야누스의 두 가지 얼굴을 포착했습니다.
분명하게 그어진 선들은 타인과의 경계를 분명히 했던 친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부분은 차가운 추상이라 불리는 몬드리안의 스타일을 일정 부분 닮기도 했습니다. 푸르고 초록초록한 컬러도 언뜻 봤을 때 뜨겁거나 마냥 밝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나 더 흥미로운 점은 김보희 작가의 작업은 동양화라는 것입니다. 묘한 차분함은 이 매체를 사용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유화의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표면이 아닌, 건조하고 메마른 무광 느낌을 주는 것이 동양화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서늘함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반면 묘사하는 대상에는 제주 고유의 정서가 듬뿍 묻어 있습니다. 도도했던 그 친구가 어렵게 연 마음의 문 사이로 슬며시 햇빛을 비추었을 때의 따스함입니다.
서양 철학과 문화의 근간이 되는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모방론은 현대 사회의 이론과 생각이 더 다양해지며 입지가 조금씩 좁아지고 있지만, 결국 우리 사람들은 가상 현실, 증강 현실 등으로 현실과 자연을 고스란히 가져오려는 욕망을 계속해서 드러냅니다. 자연을 화폭에 옮기는 김보희 작가의 작업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자연 안에는 온갖 것이 다 있어요. 추상과 구상이 다 있는거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뿐.
-티비조선 뉴스인 인터뷰-
여러 면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그림과 작가님의 작업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자연 중에서도 가장 못생긴 곳을 그려요. 거기에 더 기운을 불어넣어서 예쁘게 하지요. 너무 예쁜 건 그려 놓으면 그거보다 예쁠 수가 없거든요.
-건축 방송 인터뷰-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내 매력을 극대화할 때 희열을 느낀다는 김보희 작가의 인터뷰 속 발언처럼, 우리도 모두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이의 또다른 모습을 볼 때 더 인상적입니다. 흔히 반전 매력이라고 하는 김보희 작품 속 '숨은 아름다움 찾기'에 주목해 봅니다. 아직은 관광객의 손때가 많이 묻지 않아 지나치게 시끄럽지 않은, 잠재력을 지닌 제주의 몇몇 지역을 떠올리게 하네요. 여러분에게도 소개하고 싶은, 제가 3년을 머무르며 친해진 도도한 친구들입니다.
음악이든, 미술이든, 학문이든… 주류인 서양 문물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아시아 문화들이 존재합니다. 굳이 문화 다양성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사실 우리의 취향과 경험을 확장시켜주는 것은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한 서양보다는 동양의 것들이 아닐까요? 김보희 작가의 작품은 서양화보다 좁은 입지의 동양화 장르를 꾸준히 전개해 나가는 귀한 보석 같습니다.
제주 자연을 고스란히 빼닮은 김보희 작가의 그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단정하게 하는 하루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문화예술 감상의 수많은 효용 중에서도 특별히 값진 가치가 ‘마음의 정화’이니까요.
늘 제주에 머무르거나, 혹은 제주에 살고 있어도 원할 때마다 자연을 찾을 수 없는 우리. 잠시 그림의 힘을 빌려 마음이 맑아지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저처럼 문득 친구를 떠올리게 되어 반가운 옛 추억이 나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있을 거예요.
이제 여러분께 다시 한 번 묻습니다.
미술이라는 양념, 일상이라는 여러분의 식사에 뿌려드려요.
아트리더 박수은(큐레이터,강사,콘텐츠 제작자)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각예술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정성껏 끓인 죽에 참기름을 한 숟갈 넣었을 때, 밍밍한 국물에 간장을 두 방울 떨어뜨렸을 때 맛이 확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이토록 좋은 것, 혼자 보기 아까워 인터넷 골목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비바 아르떼(예술 만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