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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리더 박수은 Mar 08. 2024

제주의 공기를 품은 초록 '김현수'-미술 에세이①

제주의 시각 예술을 아트리더 박수은의 언어로 만나보세요.

미술관에서 근사한 작품을 만나면 모르는 옆 사람에게 자꾸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가슴 한켠에 차곡차곡 쌓이는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 혼잣말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글을 이곳에 풀어 놓습니다. 

앞으로 제주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 표현하는 예술 작품과 작가를 소개할 텐데요. 첫 번째는 가장 오래된 기억인 고향 제주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김현수입니다.       


김현수, <마주한 우연>, 2023, 53x91cm, 장지에 과슈


서울에서 나고 자란 우물 안 개구리,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다. 

2019년 남편이 제주로 발령받았습니다. 지방 근무지 중 한곳을 꼭 선택해야 했을 때, 둘 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른 곳이 바로 제주였습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알듯 제주살이는 모든 육지 사람의 로망이니까요.


그렇게 제주에서 3년을 꽉 채워 살았습니다. 공·사립 미술관에서 일하며 제주문화예술재단의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지요. 주말에는 빨간머리앤이 초록지붕집 들판을 휘젓듯 마냥 들떠 제주 전역을 쏘다녔습니다.  섬 구석구석의 미술 기관과 독립 서점을 도장 찍기 하고 산과 바다 경치에 푹 잠기며 추억이 패스츄리 빵처럼 겹겹이 쌓였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김현수 작가님과 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제주를 고향으로 느낀다는 것인데요. 작가님은 진짜 고향, 저는 가짜(?) 고향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이 섬을 떠올릴 때 느끼는 애틋함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만큼 섬 곳곳에 추억과 흔적이 녹진하게  묻어 있습니다. 


제주는 건물이 낮고 도시에 비해 아직 계발되지 않은 자연이 찬란합니다. 사실 저는 제주에 오기 전까지 한 번도 서울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답니다. 전국에서 건물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동네 중 하나인 홍대입구역으로 통학했고, 첫 직장은 삼성역 트레이드타워였지요. 한 마디로 인공물이 자연물보다 익숙한 환경이습니다. 


그때 저는 자연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사실 누릴 기회조차 없었던 게 맞습니다. 삶은 늘 치열했으니까요. 숲과 바다를 눈으로 직접 보러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훌쩍 떠나는 일이 사치였던 20대를 지나고, 저는 30대 중반에야 자연 중의 자연, 제주의 맨얼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바다 보면서 밥 먹을래?”

“좋아! 무슨 바다로 갈까?”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바다를 보며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제주는 참 은혜롭지요. 도시락을 싸온 날에는 밥을 일찍 먹고 콘크리트 옥상 대신 무성한 풀숲 사이를 산책하곤 했습니다. 


제주에 살 때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낯설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주인공의 남편이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며 직장 동료들과 대화하는 신이었는데요.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단순한 네모 옥상에서 휴식하는 그 모습이 문득 삭막해 보였습니다. 그때의 제겐 푸르고 푸른 자연이 지천에 널려 있었으니까요.

‘아, 나도 강남에서 일할 땐 저랬었지…’

쓰레기통 옆에서 담배를 급하게 피는 선배들 곁에서, 복잡한 냄새를 맡으며 뻘쭘하게 서 있던 날을 회상하며 새삼 변해버린 주변을 실감했었습니다.       


김현수, <지나고 나면>, 2023, 60.6x72.7cm, 장지에 과슈  


그만큼 자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제주의 핵심이자 근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주 자연을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사실 자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 이를 어떻게 재해석하느냐에 따라 구성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다양한 색과 형상은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영감의 보물 상자와도 같은데요. 그래서 어떤 작가가 어떤 형태, 어떤 색상, 어떤 소재를 선택해 드러내 보이느냐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묵직한 색감과 간결하고 정돈된 선과 면을 선보이는 김현수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매개로 한국화 특유의 그윽한 색과 우아한 분위기를 살려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2021년에는 제주청년작가전 회화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다양한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꾸준히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김현수 작가의 고향은 제주입니다. 섬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 청년작가에게 산과 바다, 동글동글한 검정 돌멩이는 숨 쉬듯 자연스러웠겠지요. 소중한 것은 조금 거리를 두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법. 물속의 물고기처럼 자연에 잠겨 살다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한 작가는 그간 당연했던 푸르름이 사실 참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다이어트할 때에도 아는 맛이 무서운 것처럼, 저 또한 가끔 못 견디게 제주가 그립습니다. 그럴 땐 남편에게 ‘아이는 국제학교로 보내야겠어.’ 진담반 농담반으로 말을 건네곤 하지요. 이쯤 되면 작가님과 저, 둘 다 고향을 제주라고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요? 


김현수, <자라는 마음>, 2023, 60x60cm, 장지에 과슈  


다음으로 그림 자체를 들여다보겠습니다. 고백합니다. 사실 김현수 작가의 작업을 가장 먼저  소개한 데에는 저의 개인적 취향을 솔찬히 반영했습니다. 저는 너무 사실적이기보다는 형태가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을 선호합니다. 바로 구상과 추상을 반반씩 섞은 반추상이지요. 


구상은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는 것이고, 추상은 화가가 자유롭게 머릿속 생각을 어떠한 제한도 없이 펼쳐두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반추상 양식의 작가로 수화 김환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반추상은 확실한 형상을 띄기도,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 사물이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형태를 그리지요. 육지 사람이든 섬사람이든 누구나 마음에 제각각 품고 있는 제주 풍경을 그려내는 방식 중 하나로 꼭 어울리지 않나요? 


그것은 비 오는 날 달렸던 516 도로 위의 축축한 물빛 공기일 수도 있고, 그렇게 도착한 울창한 숲의 빽빽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특유의 초록과 그간의 경험들로 인해 충분히 김현수의 풀숲을 알아차립니다.


다음으로 형태를 볼게요. 동글동글하거나 적당히 곧은 선은 조화롭게 어우러져 기본 조형 요소로 구성된 화면에 크고 작은 변화를 줍니다.  


편평하게 칠한 평면적 표현도 매력적인데요. 풀 하나하나를 진짜처럼 묘사하지 않고 잔 붓터치를 과감히 생략합니다. 그의 한국화 작품에서 제주를 넘어 소박하고 맑은 한국의 미감을 발견하는 부분입니다. 


색감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차분한 색감은 쳐다보는 이의 마음을 기분 좋게 가라앉혀 줍니다. 혼자서만 도드라지는 색이 없어 편안한 분위기는 그 자체로 제주를 물씬 닮았지요. 꼭 필요한 핵심이 초록으로 남았습니다. 손바닥을 대면 따뜻함이 느껴질 것만 같은 ‘초록초록’입니다.       


삶은 지독하고 외롭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머금고 계속해서 흘러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내 안의 나를 찾는 여정이지 않을까. 
나에게 그리는 행위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계속해서 확인하는 과정이다. 
오늘도 그리워질 이 순간을 조용히 소중하게 살아낸다.     
-김현수 작가 노트 中-


작가노트에 따르면 김현수 작가의 작업은 기억 속 장면을 예리하게 포착해 화면에 옮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초록 들이 풀잎과 나무가 되고 들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주에서 자라난 작가가 어릴 적 푸른 자연에서 만난 짙은 초록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김현수,<시골길>,2022, 박수은 소장


그림을 보며 나는 어떤 제주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나요? 

그의 그림은 우리가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평면 속 단순한 이미지가 작가 개인의 유년 시절 기억을 벗어나 보편적인 모두의 경험으로 확대되는 순간이지요. 


유난히도 뾰족한 나무와 짙은 흙, 까만 돌멩이와 구불구불한 길은 어린 날 뛰놀던 동네 풍경 같기도 하고, 외로운 들판 같기도 하고, 어느 지친 날 마주한 슬픈 풍경 같기도 하다는 작가의 말이 그림을 보고 느끼는 법에 대한 친절한 안내자가 되어 줍니다.  


육지로 돌아와 자연에 대한 결핍을 심하게 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희 집에 한 점 있는 김현수 작가의 그림을 보며 그때 그 시간, 그 장소…행복하게 거닐었던 풍경을 떠올립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미술작품은 어떠한 장소의 공기를 품고 있나요?   

      



미술이라는 양념, 일상이라는 여러분의 식사에 뿌려드려요.

아트리더 박수은(큐레이터,강사,콘텐츠 제작자)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각예술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정성껏 끓인 죽에 참기름을 한 숟갈 넣었을 때, 밍밍한 국물에 간장을 두 방울 떨어뜨렸을 때 맛이 확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이토록 좋은 것, 혼자 보기 아까워 인터넷 골목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비바 아르떼(예술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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