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보석같은 책을 소개해 드려요, 박수은의 아트리딩
미술품을 치료하는 보존과학의 세계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책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려요. 여기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손끝’과 ‘손길’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세심하게 골랐을지 가늠할 수 있는 제목입니다. 예술가의 손끝 하면 아무래도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가 떠오르고요. 과학자의 손길에서는 짧게 스치지 않고 오래 무언가를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보살피는 태도가 연상됩니다.
한동안 책들을 집중해서 읽느라 조금 바빴어요. 양에서 질로 전환되는 순간이 지금 이루어져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제껏 저의 에너지를 글자로 바꾸어 블로그에 왕성하게 선보여 왔어요. 그러나 1일 1포스팅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하에 아직 여물지 못한 글이라도 일단 ‘업로드’를 눌렀습니다. 양이냐 질이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당장 글을 올린 뒤에 해치워야 할 굴렁쇠 같은 살림과 육아 앞에서 저는 사실 90%의 글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여러분의 해석에 맡겨왔던 것 같습니다. 네 끝까지 퇴고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것 맞습니다. 앞으로는 조금씩 더 나아질 거라 스스로를 믿어 봅니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의 시간을 사용하는 일. 글은 곧 책임입니다. 읽는 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사유와 통찰을 제공할 수 있는 글인지,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를 이제야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길고 긴 고민의 끝에 결론에 다다랐어요. 퇴고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읽을만한 글감을 캐치하고 처음부터 밀도 높은 문장을 작성해 두어야겠구나. 한 마디로 수준이 높은. 그리고 퇴고를 ‘잘’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겠구나. 영양소가 골고루 포함된 양질의 음식을 먹어야 황금색 똥이 나오는 것처럼, 공들여 쓴 훌륭한 글을 읽어야 내가 토해내는 글에도 손톱만큼이나 반영되는 것이군. 그래, 읽고 싶은 책이 많아, 아무것이나 읽을 수 없구나. 사실 읽기와 쓰기를 반복하는 모든 이에게 이러한 사실은 너무 평범한 진리인데, 제가 이렇게 느립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글을 읽어왔습니다. A 책을 읽어야 하는데 B 책이 재미있어 보이면 망설임 없이 읽던 책을 버리고 다른 책으로 갈아탔습니다. (많은 경우 A의 장르는 미술입니다, 아! 평생 애증의 대상) 철저한 계획에 따라 나의 머릿속에 무엇을 집어 넣을지 선택하고 강인한 의지력으로 그대로 실행해야 하지만, 이제껏 저는 너무나 즉흥적으로 정보를 잡식해왔던 것입니다. 지식의 거름망이 촘촘해지기도 전에 말입니다.
위의 진부한 깨달음은 보다 신중히 읽을 책을 고르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중 간택된 책이 바로 오늘 추천할 책입니다. 나름대로 꼼꼼하게 선정한 도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국립현대미술관 김은진 학예연구사님의 ‘예술가의 손끝에서 과학자의 손길로’입니다.
사실 대중적으로 널리 읽힐만한 소재를 다룬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미술’도 관심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극명하게 나뉘는 판국에 미술(학예연구) 분야 중에서도 더 뾰족하게 파고 들어가야 하는 보존과학이 선뜻 광활한 책의 바다에서 건져 올릴 단 하나의 주제가 아닌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미술작품에 관심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컬렉터나 큐레이터들이라면 한 번쯤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글을 읽노라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성실하게 내용을 담은 것이 느껴집니다. 책의 내용이 알토란처럼 꽉 찼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책에 담긴 정보는 실무를 하고 수장고에 드나들면서도 쉽게 알기 힘든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국공립미술관이라 하더라도 보존가가 고용되어 더군다나 상시 일하는 곳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전문연구기관이나 개인 보존가의 도움을 외부에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보존이나 보존과학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책 내용을 살짝 빌려와 소개해 보자면, 미술품을 연구하는 학문의 한 분야입니다. 미술작품의 미학적 관점보다는 물성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작품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지요. 아픈 작품을 치료하는 ‘미술품 의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중문화 속 캐릭터로는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의 준세이나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사라진 그림을 감쪽같이 재현해 내던 배우 김래원이 있습니다.
작가님은 과학고와 카이스트에서 공부한 정통 이과생이었습니다. 여행 중에 우연히 마주한 미술품 복원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어 영국 뉴캐슬 노썸브리아 대학교에서 회화 보존을 공부하고 돌아왔고,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일하는 중입니다.
이 책은 미술관에서 보존가로 일하면서 맞닥뜨렸던 문제들과 현대미술 작품의 보존에 대한 끝없는 고민 속에서 쓴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인 유화부터 최첨단 미디어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보여주며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미술 보존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반인과 전문가 사이에 위치한 독자를 위해 적당한 난이도를 유지한 점이 가장 인상 깊었고요. 두 번째로는 유명한 작품을 예시로 들어 누구나 궁금해할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부분이 높고 낮은 독자의 눈높이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책에서 저는 특히 수장고가 미술작품의 무덤인지, 미술작품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장소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미술관의 수장고는 작품을 보관하는 일종의 '보물 창고'입니다. 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작품은 아주 일부일 뿐이며 작품 대부분은 수장고에 잘 보관되어 있지요.
평소 수장고에 출입할 때면 ‘이렇게 훌륭한 미술작품들이 모두 전시 또는 공개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해왔는데요. 물론 조도 조절이나 작품 보호 문제 등 다양한 이유 때문인 점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불이 꺼진 서늘한 수장고 안에서 잠들어 있는 미술 작품들이 ‘과연 행복할까?’ ‘작품 탄생의 이유처럼,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지는 않을까?“라는 다소 감성적이고 엉뚱한 생각을 했던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답은 없겠지요. 직업 미술인들 사이에서도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의견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보이는 수장고visible storage, 개방형 수장고open storage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소장품의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음은 물론,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전체 대중이 다양한 작품을 살펴볼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취향은 무수히 많은 더미에서 내 것을 발견할 때 탄생합니다. 애초에 접할 수 있는 표본이 적다면 뚜렷한 취향을 찾는 것은 더욱 더 힘들어집니다. 안그래도 쉽지 않은데 말이지요. 한 자리에서 너무나 많이 집적된 미술 작품을 본다면 처음엔 머리가 아찔하겠지만, 나중엔 그 중에서 'MY PICK'을 찾고야 말리라는 신념으로 미술품 더미를 집요한 시선으로 열심히 헤집을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책을 추천하는 글에서, 내용을 전부 담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재미도 없는 일일테지요. 나머지 읽기는 각자의 몫입니다. 미술과 관련된 이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아는 즐거움을 일깨워줄 수 있는 미술 책이라 소개해 보았습니다. 그럼 박수은의 아트리딩은 다음 이 시간에 또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눈 앞으로 물씬 풍기는 봄의 향기를 맡으며 지내시길 바래요. :)
2021.02.09.
아트리더 박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