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회사 업무가 아닌 다른 일로 여러 사람들 앞에 섰다. 회사 일로 남들 앞에 설 때엔성과를 내기 위해 보통은오랜 준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재작년 제안발표와 작년 인증심사 발표 준비 때도 큰 부담을 갖고 스터디카페를 찾았었다. 그만큼 부담이 컸었다. 하지만 그 외 20년이 넘는 회사 생활동안 개인 자격시험 준비를 제외하고는 도서관을 찾은 적이 없던 나였다.
이번 무대는 부담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내 성과에 대한 평가가 의미 없는 자리였다. 오히려 내 강연을 듣고, 조금이라도 얻어갈 청강생들의 성과가 중요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들이 희망하는 현직 선배의 얘길 들으며 막연하게 그렸던 직장생활의 실체를 조금 더 구체화하는 자리였지 싶다. 3개월의 학습과정이 실무에서 얼마나 활용가능한지도 알고 싶었을 테다.
강연을 듣는 입장에서는 난 자신들이 꿈꾸는 직군에서 경험 많은 선배이자, 멘토였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직무 관련 강의만 듣다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들은 현업의 멘토 얘기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에 불을 켜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뭐라도얻어가야 하는 멘티들의 성과가 더 필요할 자리라는 생각을 들었다.
일의 시작은 딱 일주일 전부터였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울리는 스마트폰 알림 진동. 스마트폰을 열고 보니 전문가와 수요자를 연결해 주는 플랫폼앱 '크몽' 메시지였다. 출간한 전자책 구매 알림 메시지인가 싶어서 열어봤지만 메시지의 내용은 뜻밖의 요청이었다.
이번 오월 내가 일하는 업무분야의 구직자, 초보자를 위한 전자책을 출간했다. 사 년 전 온라인 구직 플랫폼 운영진의 제안으로 전자책 형식의 글을 썼고, 쓴 글을 직접 낭독, 녹음하는 작업을 했었다. EBS 방송 녹음 이후 두 번째 육성 녹음이었다. 4시간이 넘는 강행군이어서 꽤 기대했었던 작업이었다. 솔직히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많은 판매가 이뤄지지 않았고, 해당 플랫폼 온라인 사이트는 아쉽게도 이년 뒤에 폐업했다. 해당 플랫폼이 사라진 뒤 한동안은 작성한 글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노트북에 고이 저장된 글을 보게 됐고, 그냥 묻히는 게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전자책으로 출간 한 번 해볼까'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올 삼월에 한 챕터씩 꺼내서 이틀에 걸쳐 원고를 조금 다듬었다. 생각보다 서둘러한 작업이었지만 '출간'이라는 두 글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다. IT 전문서적, 취업 관련 자기 계발서에 가까워 고심 끝에 '크몽'에 전자책으로 출간했고, 이번 강연까지 이어지게 됐다.
급하게 요청이 왔고, 준비할 시간도 짧았지만 난 큰 고민 없이 수락했고 그렇게 난 강연무대에 서게 됐다. 처음 안내를 받고 강의실에 들어섰을 땐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학생은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하나, 둘 학생들이 들어왔고, 강연시간이 얼마 남지 않자 대부분의 학생이 자리에 앉아 강연 시작을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희망디딤돌 네트워크 엔지니어 직무교육 현직자 특강을 맡게 된 OOO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사실 오늘 이곳에 오기 전부터 조금 많이 설렜습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강연을 한다는 것 자체는 긴장됐지만 20여 년 전 여러분과 비슷한 처지에서 취업을 준비했던 당시의 제 모습이 생각나서 오늘이 더 기다려지더군요. 한 시간 동안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쪼록 아주 작은 팁이라도, 사소한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오늘의 강의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강연은 어색했던 처음 분위기와는 다르게 언제 지나갔나 싶을 정도로 빨리 흘러갔다. 마지막 프로젝트 구축사례를 설명하는 챕터에서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울 정도였다. 더 많은 걸 설명하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쉽지만 그렇게 내 강연은 끝이 났다.
강연이 끝나고 바로 각 조별로 멘토링을 맡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는 이 과정이 사 개월의 종착역과 같다. 삼 개월 학습 과정 동안 배웠던 것을 활용해 프로젝트 주제 선정부터 수행, 발표까지 이어질 예정된 최종 과정이었다. 이런 프로젝트 주제 선정을 각 조별로 멘토링해서 도와주는 게 내 이번 강연의 연장이었다. 물론 오늘 이후 중간 기술점검 및 피드백 또한 멘토인 내 몫이다.
각 조별로 프로젝트 주제선정에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씩이었다. 학생들은 삼개 조로 나눠서 상담실에서 나와 만났고, 각 조가 사전에 준비한 프로젝트 주제를 듣는 게 우선이었다. 난 학생들이 준비해 온 주제부터, 선정의 이유, 프로젝트 진행하며 기대되는 결과에 대해 함께 물어보고, 들었다.
멘티들의 열정은 컸지만 학습 과정에서 얻은 지식만으로는 선정 주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제부터 함께 의논하여 수정해 갔고, 원하는 결과와 진행 과정 등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멘토링한 주제에 대해 진행 중 중간점검 및 피드백 과정이 세 시간 포함되어 있지만 조금 더 앞서 시작부터 체크해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각 조별로 우선 선정된 주제에 맞는 토폴로지부터 그려서 차주에 중간점검 요청을 하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프로젝트 주제 선정 논의 시에 막막해하던 멘티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각 조별로 한 시간씩 그렇게 난 세 시간을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멘토링이 끝나니 내 목소리는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반나절을 떠들었으니 아무래도 목이 정상이 아닌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센터를 나오면서 아픈 목과는 반대로 머릿속은 한결 밝아졌고,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모두가 만족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만족스러워하는 학생들이 있었다는 확신에 강연과 멘토링을 수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에 조별로 걸려올 전화가 금세 기다려진다. 또 어떤 걸 알려줘야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감에 이주 뒤 중간점검일이 기대되는 저녁이다.
'그런데 얘들아 1차 멘토링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왜 1조만 연락 오고 나머지 조는 연락 안 하니? 잘하고 있는 거지?'
전자책을 내고 나름 경쟁력 있는 시장이라 생각했다. 한 달에 10권, 일 년에 120권만 팔면 좋겠다는 부푼 꿈을 꿨다. 그렇게 출간을 한지 반년이 되어간다. 계획대로라면 내 책은 60권이 판매됐어야 했고, 크몽 내 계정에 수익금은 70만 원이 쌓여있어야 했다.
하지만 꿈은 꿈이고, 현실은 달랐다. 전문서적에 속하는 내 전자책은 검색 횟수도 적었고, 판매수는 당연히 저조했다. 전자책으로 낸 수익이라고 해봤자 몇만 원이 고작이었다. 역시 어려운 시장임을 깨달았고, 차츰 배추를 셀 때 써야 하는 그 이름 '포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내게 또 다른 기회를 줬다. 전문적인 강연자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설렐 수 있었고, 보람을 느꼈던 자리였다.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번 7시간 즐거움, 설렘만으로도 족하다. 게다가 이번 강연, 멘토를 맡으면서 계획했던 수익금도 다른 방법으로 쌓았으니 일거양득, 일석이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