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반대는 불통이 아닌 침묵과 단절이다.
"엄마, 나… 인생 첫 술 마셔보고 싶어."
며칠 전 곧 스물을 앞둔 딸이 '인생 첫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요청을 아내에게 했다. 한 달도 남지 않은 스물이고, 최근 입시 때문에 힘들었던 딸을 봐왔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수시 결과 발표에 좌절하는 딸을 보며 가끔 맥주 한 잔이라도 마시고 털어냈으면 하는 마음이 오히려 굴뚝같았던 나였다.
"우리 딸, 어떤 술 드시겠습니까? 안주는 또 뭘로 모실까요?"
두 아이를 키우며 아내나 난 요즘 부모같이 않은 한 가지 철학이 있다.
'첫 술은 아빠한테 배워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아들도 스물이 되기 하루 전 '인생 첫 술'을 가족 행사로 근사하게 치렀다. 동생 내외까지 출동해 첫 조카의 '인생 첫 술' 자리를 축하해 줬다. 아들 덕분에 가족행사가 되어서 더 의미가 있었던 행사로 기억한다.
주변 지인들은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반응이 엇갈린다. 아이들이 대단하고, 그런 자리를 축하해 주는 부모인 우리도 대단하다는 반응과 요즘 아이들이 어떤 세대인데 이미 술 경험이 있을 거라는 반응.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두 아이 모두 우리의 의도나 의미는 이미 알고 있었고, 굳이 넘어가도 될 이런 '인생 첫 술' 행사를 부모의 축하를 받으며 한다니 고마웠다.
"난 우리 아빠 너무 좋아. 다른 친구들 얘기 들으면 아빠처럼 다정하고, 아빠랑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도 없는 듯 해. 다들 어색하고, 대면대면하다고 하더라고."
술병이 조금 쌓여갈 때쯤 딸이 내게 가슴 찡한 고백을 했다. 부모 자식 간에 당연스러운 얘기 같지만 열아홉, 아직은 사춘기 끝자락에 있는 딸에게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긴 아니었다.
"와~, 딸에게 이런 고백을 받아보고. 아빠 인생 잘 살았네 정말. 아빠도 너희들이 아빠 자식이라 고마-워... 힝~"
술 때문인지 갱년기여서 그런지 눈앞이 뿌예져서 말을 잊지 못했다.
"아빠, 난 아빠가 내 사회생활로는 롤 모델이에요. 정말 리스펙 하는 거 알죠?"
아들까지 한마디를 더 거들자 눈앞을 뿌옇게 했던 눈물이 결국은 흘러내렸다.
"헉-, 우리 김철수 씨 아들, 딸 칭찬에 오늘 잠 다 잤네."
아내의 농담덕에 그리 오래가지 않은 감동 모드였지만 오늘 술자리는 우리 가족 모두가 마음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자리가 됐다.
세상 모든 부모가 자식이 사랑한다, 존경한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서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아니 오히려 평생을 이런 표현조차 듣지 못한 부모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 세대만 보더라도 부모에게 표현은 어색하고, 궁했다.
'뭐 말로 해야 아나', '에이 쑥스럽게 뭘 당연한 말을 해'
생각해 보면 말로 해야지 알고, 세상에 당연한 말은 없다. '자식 길러 봐야 부모 은혜를 안다'는 속담의 의미처럼 철부지 자식은 부모가 돼 봐야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자녀들을 키우며 부모들도 하루하루 성장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만큼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백 점짜리 자식은 아니었지만 내리사랑의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그 사랑을 대물림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소통은 중요하다. 표현 없이 서로를 알 수 있는 사이는 없다.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 형제 사이도 그렇다. 가족 간에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너무 가까워 소홀해지기 쉬운 사이고, 말하지 않아도 늘 볼 수 있으니 다음으로 미룰 수 있는 관계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다른 어떤 관계보다 중요한 사이다.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다른 어떤 관계의 사람들보다 흔들림 없이 먼저 내 편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가족이다. 조건 없이 덮어두고 내 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관계다. 가족이라는 관계에서는 큰 이점이 있다. 다른 어떤 사람의 말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먼저 신뢰하고, 안아 줄 수 있는 사이다. 몇 마디의 말과 눈빛만으로도 따뜻한 품을 내어줄 수 있는 사이다. 일반적인 관계에서 그런 관계까지 이어지려면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가족은 다르다. 같은 시간을 함께 지냈고, 긴 시간 희로애락을 함께 이어왔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이점은 시간과 노력으로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가족 또한 멀어질 수 있다. 오히려 늘 가까이 있으니 소통하지 않고도 괜찮다고 여기고 당장 풀어야 할 오해도 미룰 수가 있다. 매일 얼굴을 본다고 생겼던 오해가 풀리거나, 오랜 기간 함께 했다고 상대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작은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더 큰 오해가 된다. 일상의 습관처럼 잠깐의 표현과 소통만으로도 평생을 이어갈 인연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가. 가족관계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설 필요가 있다.
소통의 반대는 불통이 아니라 침묵과 단절이다. 함께 사는데도 대화가 없어 외로워지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마음이 멀어지는 가족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매일 옆에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 닿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걸. 평생 내 편을 이어가려면, 그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아이들과 나눈 한 잔의 술, 그리고 오랜 시간 묵혀둔 마음을 터놓았던 그 대화들이 아마도 우리 가족에게 또 하나의 단단한 기억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