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었던 파리에서의 제대로 된 첫 끼니
사랑하는 사람과 프랑스에 간다면 에스까르고를 까주세요
가을에도, 겨울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추위가 스며들던 오늘 나는 파리에 도착했다. 오기 전에 에펠탑, 개선문이야 구글에 치면 사시사철 다양한 모습이 나오지 않느냐고, 그러니 굳이 보러 가지 않겠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뻥뻥 쳤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내면에는 35시간의 힘든 여정 끝에 도착한 파리에 24시간도 채 머물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나보다.
몽파르나스 역에 무거운 배낭을 맡기고 주변을 둘러보러 나왔다. 무엇보다 나름 미식의 나라라는 프랑스에 도착하고 먹은 첫 음식이 맥모닝이었다는 점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반드시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점심시간이라기에는 조금 일렀지만 대로변 레스토랑 이곳저곳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서울의 레스토랑에서 풍기는 냄새와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풍기는 냄새가 크게 다를 리 없다. 하지만 35시간의 여정 후 낯선 언어들의 향연 속의 늘 맡던 그 냄새는 기분 탓인지 제법 이국적이었다.
현지인 맛집이라고 하면 보통 찾기 어려운 외진 골목 속 조그만 식당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즐겨가는 식당들은 대개 골목에 있다. 아무 근거 없지만 적어도 어느 기간 이상 살아남은 식당이라면 골목 식당들은 그들만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다. 그래서 파리에서의 첫 점심은 골목식당에서 먹기로 결정했다. 아침에 먹은 베이컨 에그 맥머핀과 커피 한 잔은 12kg짜리 배낭을 매고 이리저리 다니는 동안 이미 뱃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주린 배를 움켜잡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대로변 식당들을 지나 골목식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오며 잠시 전에 스쳐지나간 맥도날드가 생각나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식당 하나를 찾게 되었다. 식당 이름은 Aux Artistes. 프랑스어로 예술가 혹은 연예인이라고 한다. 사실 외관이 그렇게 식당답지는 않아 처음에는 식당인줄도 몰랐다. 주린 매의 눈으로 운영시간에 점심 저녁시간이 구분되어있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성실한 대로변 식당들과는 달리 이 식당은 무슨 배짱인지 12시부터 영업을 한단다. 12시까지는 30분이 남았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괜찮은 평이 많았지만 다른 주변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식당에 꽂혀 30분을 앞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리게 되었다.
20분쯤 기다렸을 때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유쾌하게 생긴 남자분이 감사하게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을 하였다. 좁은 식당 안으로 들어 가보니 2인용 테이블 두 개가 4인용 테이블 하나로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테이블이 배치되어있었다. 프랑스식 코스요리를 파는 식당이었다. 스타터로는 에스까르고 12마리, 메인으로는 비프 굴라쉬, 디저트로는 블루 치즈와 이 달의 와인 한 잔을 시켰다. 굴라쉬는 헝가리 요리지만 뭐 어떠랴, 에스까르고와 블루치즈가 프랑스식인데.
가만히 앉아서 식당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마치 미국식 펍처럼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세계 각국의 자동차 번호판들 사이로 제법 멋진 미술품 몇 점이 불협화음처럼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 가정식을 표방하면서 비프 굴라쉬를 팔고(심지어 주인장 추천요리였다!), 스테이크에 감자튀김을 내오는 주인장의 자유분방함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하지만 잘 만든 재즈곡처럼 그 불협화음은 분명 아름다웠다. 주문을 하고 가게를 둘러보는 15분 동안 좁은 가게는 어느새 꽉 차있었다. 내 왼쪽에는 한 젊은 커플이, 오른쪽에는 서로 친구로 보이는 노년 부부 두 쌍이 앉게 되었다. 총 세 쌍의 프렌치 커플 사이에서 그 가게 유일의 혼밥족은 당당히 앉아서 열심히 두리번댔다.
에스까르고가 나왔다. 버터에 볶은 바질향과 에스까르고 특유의 냄새가 훅 풍겼다. 육즙이 뚝뚝 흘렀다. 쫄깃한 육질과 바질버터의 향기로운 짭조름함.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맛이었다. 지금은 거들떠도 안 보는 초코파이를 이등병 때 감격하며 먹었던 것처럼 때와 장소의 차이가 한 몫 했겠지만 이렇게 훌륭한 점심을 먹는다면 저녁도 맥도날드에서 때워도 될 것 같은 만족감을 느꼈다.
달팽이를 하나하나 까먹으며 그 환상적인 맛에 익숙해졌을 무렵 왼쪽의 커플을 보니 그네 테이블 위에는 에스까르고와 샐러드 한 접시가 놓여져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을 떠올릴 때면 로맨틱함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들도 역시 요리가 나오기 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손을 쓰다듬어가며 열심히 애정 표현을 하던 로맨틱한 커플이었다. 남녀가 번갈아가며 에스까르고를 열심히 까고, 그 동안 에스까르고를 까지 않는 쪽은 샐러드를 먹는다. 하지만 열심히 깐 에스까르고는 상대 입 속으로 들어간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가운데에 새우구이를 놓고 열심히 까대는 커플을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새우를 사랑해 마지않지만 새우 껍질을 까는 것이 귀찮아 통새우를 잘 안 먹는다. 그런 나에게 새우를 까주거나, 아니면 내가 누군가에게 새우를 까주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어마어마한 호의이자 자기희생이다. 이들만 이러는 건지 프렌치 커플들 대부분이 이러는지는 표본이 없으니 알 수가 없지만 서로를 위해 달팽이 껍질 속에서 달팽이를 꺼내주는 그 장면이 무척 로맨틱하게 보였다.
뒤이어 나온 비프 굴랑쉬와 블루치즈, 그리고 남은 와인을 마저 마시고 자리를 떴다. 저 커플은 각자 여섯 개씩 밖에 못 먹었지만 나는 열두 개나 먹었으니 된거라고, 오늘 먹은 기름진 에스까르고는 너한테 갈 거라고 시린 옆구리를 달랬다. 사실 염장이 사정없이 질러진 덧에 마음이 헛헛할 법도 했지만 그보다 훈훈한 마음이 더 컸다. 분명한 것은 오늘의 조그만 프랑스 골목식당 속에서 꽉 찬 사람들과, 그 사람들로 인해 뿌옇게 성에가 낀 창문, 그 앞의 사이 좋던 노년 부부 두 쌍, 로맨틱했던 젊은 커플의 모습, 그리고 에스까르고는 이번 여행 중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과 프랑스에 온다면 똑같은 식당 똑같은 자리에서 에스까르고를 까주고 싶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프랑스에 오면 서로에게 에스까르고를 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