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영원기차
연쇄되어 달려가는 기차를 본 적이 있는가. 각자의 얼굴을 앞차의 꽁무니에 틀어박고 달리는 기차는 서로의 뒷모습만 볼 수 있음에 한 치의 아쉬움도 없다. 나도 차라리 저기 달리고 있는 기차 중 한 편이고 싶다. 늘 앞차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그 사실에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고 묵묵히 달려가는 저 기차. 기차와 닮은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나에게 보이는 것은 너의 뒷모습 뿐이다. 너는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다만 기차가 연료를 태워 움직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태워가며 움직이는 것이다.
한때는 네가 드디어 서서히 돌아서 나와 앞모습을 마주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서서히 뒤로 도는 것이 아닌 그저 휘어진 철로를 달려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하는 것일 뿐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 사람 역시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너를 바라본다. 이 기묘한 4량 열차는 벌써 일 년 넘게 쉴 새 없이 달리고 있다. 차라리 누군가가 강제로 제동을 걸어 바라볼 지언정 서로의 마음을 좇아 달리진 못하게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 년이나 지났나. 이 만하면 벚꽃이 만개할 즈음이라 생각하고 약속을 잡았지만 아쉽게도 거세게 내린 봄비로 벚꽃은 이미 다 져버린 밤이었다. 그날 너와 나는 술을 마셨지. 오를 대로 오른 술기운에 취해 우리는 사랑을 얘기했다. 이미 한 번 사랑에 데인 너는 더 이상 순수한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다 하였고 이미 순수를 잊은지 오래였던 나는 순수하지 않아도 가슴은 뜨거울 수 있다 하였다.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너는 너의 뜨거운 외사랑에 대해 털어놓았다. 나는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순수를 잃어버렸다던 너의 사랑은 그 순간 더없이 순수하고 뜨거웠다. 그 뜨거운 열기로 너는 쇠못을 잘 달구어 내 가슴에 박아놓았다. 그래서 한 동안 너를 멀리했다. 시간이 남아돌아 집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술을 먹으러 다니면서도 바쁜 척, 일에 치여 사는 척 했다.
참, 와중에 네가 한다던 공연을 보러갔었다. 너도, 나도 이름을 모른다던 꽃다발 하나를 들고. 이제서야 말하지만 꽃을 유난히 좋아하던 네게 건넸던 꽃의 이름은 리시안셔스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녔고.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던 네게 나는 그런건 모르고 이게 예뻐서 사왔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삼십 분 동안이나 꽃집 아주머니를 괴롭히며 골랐거든. 공연에 잠깐 늦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냥 깜빡하고 있다가 부랴부랴 오느라 아무거나 집어왔다고 거짓말해서 미안하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네가 박아넣은 뜨겁던 쇠못은 차게 식었고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다. 나랑은 왜 술 안 마시냐 묻던 네 말에 흔쾌히 약속을 잡은게 그때쯤이었다. 생각 외로 담담하게 너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게 박아넣은 못이 차량과 차량 사이를 끊어놓았다고 믿었기에, 나는 담담하였다.
하지만 너를 다시 만난 그 날 밤 나는 네가 박은 그 못이 차량과 차량 사이를 끊어놓기는 커녕 이음매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 이후로 너를 두 번은 더 만나야 했다. 네가 내 가슴에 박아놓은 후 차게 식었던 쇠못은 두 번 씩이나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예전과는 달리 채 식기도 전에 달아올랐기에 괴로웠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못이 박힌 가슴을 안고 먼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청량함은 뜨거운 못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못이 식으며 남긴 열기는 종종 꿈으로 나타나곤 했다.
네 꿈을 꿀 때면 늘 같은 꿈을 꾼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익숙한 얼굴도, 그렇지 않은 얼굴도 있다. 이 모두가 각자의 길을 가는데 유독 너는 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 너는 나와 참 잘 맞았던 친구였기에 그것이 내 무의식 속에 남아 꿈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같은 길을 달리고 있지만 나는 쫓고, 너는 도망치는 열차와 같은 상황이 꿈에 반영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했던 것은 꿈을 꾸고 일어난 후 나는 아문 줄 알았던 화상이 화끈거리는 것을 가슴 속에 깊이 느끼면서도 마냥 즐거웠다는 것이다.
긴 여행에서 돌아와 너를 다시 마주했다. 지난 번의 그 만남처럼 담담하게 너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꽤 길었던 너의 외사랑은 끝난 상태였다. 아니, 끝난 것 같았다. 적어도 네가 밤에 전화와서 훌쩍거리며 너의 아픔에 대해 말하기 전까지는. 나는 또 바보같이 위로한답시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지. 그 날 밤은 잠들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네 생각을 할 때면 뜨겁게 달아오르는 못 하나를 가슴 속에 추가로 간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다시 만났지. 너 역시 가슴에 못이 박혀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외사랑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거든. 화끈거리는 가슴을 애써 식히며 일부러 그 이야기를 꺼냈다. 너의 외사랑은 이제는 정말 마무리 된 것 같더라.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너는 참 나를 힘들게 하지만 속으로조차 네게 화를 낼 수 없는 이유는, 네 주변에는 괜찮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 사람들을 좋아하거나, 그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는 참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과 만나기를 나는 바랄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다른 누군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 너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뉴스를 보면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그렇게나 많던데 왜 네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만 가득한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너는 행복할 사람이다.
이번 이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나 괜찮아서 더럭 겁이 났다. 너는 아직 별 생각 없다 하지만 이번에 너를 놓치면 영영 이별일 것만 같아서.
이 글은 신용재의 노래처럼 허공에 띄워보내는 편지다. 요즘 정신없이 바쁜 네가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글을 읽더라도 네 이야기인지 모를 수도 있다. 이 세상에는 가슴 아린 사람들이 워낙 많기에. 하지만 언젠가 내 마음을 네게 털어놓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노라고, 이때부터 너를 사모했노라고 이 글을 보여주며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