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 [죄와 벌](하) 완독
드디어 저의 첫 세계문학 입문서인 이 책을 완독 했습니다. 예전에는 두꺼운 책은 일단 부담감 때문에 읽기가 싫었습니다. 또 읽다가 그만두겠지.. 하는 마음이 컸고, 힘들게 읽고 난 뒤에 그만큼의 보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무래도 단기간에 책을 뚝딱 소화해버리려는 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부담 없이 그냥 매일 조금씩 읽어야지하는 마음으로 읽으니까, 완독이 그리 어렵지는 않네요. 이제 몇 권짜리 두꺼운 장편 소설이 주는 긴 호흡의 매력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얼마 전 이 작품에 대해 서칭 하다가, 마지막 6부에 등장하는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 스포일러를 당했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할수록, 그리고 그 내용에 서사가 더 가까워질수록 이미 머릿속에 내용이 박혀서 떠나질 않더군요. 그 점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그 점이 작품의 핵은 아니었거니와,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어둡고 습하고 불쾌한 분위기와 숨 막히는 서스펜스는 그 자체로 몰입도를 높여주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에필로그가 좋더군요.
참, 독서노트가 요즘 하루 뒤에 작성이 되고 있는데, 이는 제 생활 패턴 때문입니다. 오후에 일을 하고 돌아와 밤~새벽에 독서를 하고 아침에 잠들고 있거든요. 그래서 독서를 마치면 독서노트를 쓰는데, 일반적으로 아침이나 새벽에 작성으로 하고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활 패턴이라, 의아하실 수도 있는데 이해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은 3일 자 독서노트를 4일 저녁 7시경에 쓰고 있네요. 인정하겠습니다. 어제 새벽에 이 책을 완독 하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고 평소에 읽던 분량의 1.5배를 읽고 잤더니――6부가 끝이 아니라, 에필로그, 옮긴이의 해설(거의 논문), 판본 소개, 작가 연보 등 부록이 많더군요.――제정신에 글을 작성할 용의가 나질 않아 그대로 침대에 곯아떨어졌어요. 그러고 일어나서 휴일인 오늘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나니 지금 시간이 되었네요. 4일인 오늘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건 4일 독서 노트에 적기로 하겠습니다.
아래에는 책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야 당신이 죽였지요, 로지온 로마느이치! 당신이 죽였습니다……." 그는 거의 속삭이듯, 그러나 완전히 자신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 315p
'"어허 참, 뭐라고요, 내가 확신하고 있다고요? 이건 모두 아직 나의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내가 왜 당신을 거기다 집어넣어 안정을 누리게 해 줘야 하지요?"' - 316p
'"달아났다가도 스스로 돌아올 겁니다. 우리 없이 당신은 해 나갈 수 없습니다."' - 323p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에게는 감옥에서 죗값을 받는 것이 이 끔찍한 일련의 사건들을 마무리짓게 하는 일종을 돌파구이자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라스콜니코프같은 사상에 호도된 젊은 애송이보다 몇 수는 더 높은 곳에서 관망하는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아직도 삼 분쯤 창가에 서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천천히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었다. 이상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비참하고 서글프고 힘없는 미소, 절망의 미소였다.' - 386p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이 호색한이 단순히 유쾌한 성격의 쓰레기인 줄 알았는데, 두냐를 강제로 해칠 마음이 애초에 없었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자, 절망과 단념을 느끼는 장면. 은근히 순정파구나.
'그렇다. 그는 기뻤다. 아무도 없는 것이, 어머니와 단둘이 있는 것이 무척 기뻤다. 이 무서웠던 시간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마음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어머니 앞에 쓰러져 발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놀라지 않았고 캐묻지도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는 아들에게 무슨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제 그에게 그 어떤 두려운 순간이 닥쳐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로쟈, 사랑하는 내 아들, 내 첫아이!"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 416~417p
★애통하고 감동적인 장면.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만 굴었던 라스콜니코프의 심리가 막바지에 이르고, 어머니와 단 둘이 남자, 어머니 품 속의 어린아이로 되돌아 간 듯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어난 불운을 어느 정도 직감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이라면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아닐까. 힘없고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핍박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깊다. "사랑하는 내 아들, 내 첫아이!"라는 외침이 떨리게 다가온다.
'"그래 너도 눈을 더 똑바로 뜨고 똑똑히 살펴봐라! 나는 사람들을 위해 선을 원했던 거야. 그리고 이 한 가지의 어리석은 짓 대신에, 아니 어리석은 것조차도 아닌 다만 서투른 짓 대신에, 수백, 수천 가지의 선행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 422p
★애써 자신이 세계를 구원한 초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반성 없는 아쉬움만 담긴 라스콜니코프의 오만한 발언
'아아, 난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구나! 아냐, 내겐 그녀의 눈물이 필요했던 거야.…(중략)… 난 거지야, 난 쓰레기 같은 놈이야, 비열한 놈이야, 비열한 놈!' - 432p
★소냐를 찾을 자신의 마음의 기저를 깨달은 라스콜니코프의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회의감.
-에필로그-
'그가 부끄러워한 건 다름 아니라, 바로 그가, 라스콜니코프가, 맹목적인 운명의 판결에 의해 그토록 맹목적으로, 그토록 가망 없이, 그토록 막막하고 어리석게 파멸해 버렸고,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한다면 그 판결의 무의미함 앞에 순종하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463p
★징역살이 중에도 범죄에 대한 반성이 아닌, 자신의 이론에 따르면 실패하고 굴복해버린, 초인이라고 믿고 싶었으나 한낱 '이'일뿐인 자신에 대한 혐오감만 느끼는구나.
'그녀의 두 눈에서 무한한 행복감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깨달았고, 이제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 끝없이 사랑하고 있다, 마침내 이 순간이 온 것이다…….' - 474p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되찾은, 이론의 늪에서 벗어나 참회하는 라스콜니코프에게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처음이자 가장 강렬하게 느끼게 된 소냐. 사랑의 감정이 깊어짐을 느낄 때, 확신을 갖게 될 때 비로소 불안과 슬픔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져 가는 이야기, 그가 점차 갱생하고, 한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건너가면서 지금껏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을 터이지만,―그러나 우리의 지금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다.' - 476p
★마무리 문단. 대작가는 마무리도 다르구나. 이 작품 전반은 오로지 더럽고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한 세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에필로그 마지막에서 이 세계 외에 또 다른 유형의 세계도 존재하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로쟈에게 구원이란, 벌이자, 소냐이자, 또 다른 유형의 세계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