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이케아를 갔다. 기분좋게 쇼룸을 구경하고 서너가지 품목을 결제하고 나오려던 나는 계산대마다 길게 줄을 선 광경을 목도했다, "신속하고 간편한 결제"를 위해 현금 없는 매장으로 운영한다는 안내문이 무색하게, 1층 계산대는 전부 무인계산대였으며, 모두가 바코드를 스캔하느라 바빴다. 무인계산대 2대마다 직원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었으며, 가끔 무차별적으로 고객이 스스로 계산한 물건이 전부 맞는지 계산대는 팝업을 띄웠다. 직원은 더블 체크를 하며 혹시 있을 고객의 실수를 막는데 최선을 다했다.
모든 무인계산대에는 "소액 빠른 결제"라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빠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건을 1개 샀든 20개를 샀든 품목 수 상관없이 무인계산대에 줄을 서서 결제를 해야하기에, 나는 사람들이 결제하는 것을 지켜보며 생각에 빠졌다.
현금없는 매장,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이케아 <현금없는 매장> 안내문
미국, 현금없는 매장 금지안 유행
LA 헤더 허트(Heather Hutt) 시의원은 최근 현금없는 매장이 은행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주민을 차별하는 것이라며 현금없는 매장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같은 법안이 최초는 아니다. 뉴욕시,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뉴저지 등 이미 현금없는 매장을 금지시킨 바 있다.
현금없는 생활은 편리하지만, 현금으로만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시키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은행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는 노인이나 저소득층은 주로 현금을 사용한다. 퓨리서치 2022년 설문에 따르면 흑인과 라틴계 성인 가운데 거의 모든 생활비를 현금으로 지불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각각 26%와 21%였다. 이들에 대한 형평성을 고려하여 이러한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 전세계 현금 사용률이 두번째로 낮은 나라
전세계에서 현금 사용률이 가장 낮은 나라는 스웨덴, 그 다음이 우리나라다. 한국은 미국만큼 은행서비스에서 소외된 사람이 많지 않다. 카드결제 역시 전세계적으로 높은 이용률을 보이며, 무이자 할부서비스가 굉장히 잘 되어 있다. 그래서 딱히 현금없는 매장 운영이 놀랍지 않다. 이미 많은 사람이 지갑에 현금을 넣고 다니지 않으며, 카드 또는 스마트폰만 쥔 채로 결제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
현금없는 매장이 불편한 이유는 현금 사용이 불가해서가 아닌, 키오스크 주문과 같은 무인결제 때문이다. 특히고령의 어르신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키오스크 주문은 어려울 수 있다.
나 역시 영화관에 설치된 키오스크에서 팝콘을 결제하며 할인 쿠폰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몰라 한참을 해맸던 기억이 있다. 팝콘 하나를 사면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수많은 카테고리를 뒤적이며 주문하는 과정은, 전혀 간편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경험이었다.
현금없는 매장은 사용자 경험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비용절감을 위한 것일뿐.
지불의 고통
행동 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지불 방식에 따라 고통이 다르다며, 지불의 고통(pain of paying)을 말했다. 현금 결제는 내 지갑에 소유하고 있던 현금이 사라지면서 고통이 느껴지지만, 신용카드 결제는 싸인만 하면 나중에 대금이 청구되므로 덜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다. 지불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높을수록 고통스럽고,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덜하게 된다.
현금보다 신용카드 결제는 소비를 쉽게 만든다. 더 나아가 아마존 고(Amazon Go)*와 같이 내 신원을 자동으로 확인하여 결제를 처리해주는 자동결제는 한결 더 결제에 관심을 쏟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생각하면, 결제가 쉬울수록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소비하게 된다.
*아마존 고(Amazon Go): 아마존이 운영하는 세계 최초의 무인매장으로, 소비자가 스마트폰에 앱을 다운로드하고 매장에 들어가 상품을 고르기만 하면 연결된 신용카드로 비용이 청구됨. 따라서 소비자는 줄을 설 필요없이, 물건을 집어서 들고 나오면 됨. 저스트 워크 아웃 기술(Just Walk Out Technology) 이라고 명명된 블랙박스 센서가 핵심 기술임.
아마존 고 매장 철수가 의미하는 바
그러나 결제 경험이 전부는 아닌가보다. 아마존 고의 획기적인 기술은 코로나 기간 큰 관심을 끌었고, 모두가 경험해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코로나가 끝난 지금은 매장을 오히려 철수하고 있다. 2021년까지 3,000개의 매장을 열겠다는 구상은 이미 무산되었고, 기술 혁신 외에는 마트로서의 기본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무리 결제가 편리해도, 얼마나 신선한 상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지, 다른 곳에서 판매하지 않는 특별한 상품이 있는지 등 마트를 찾는 기본 요인을 무시하면 고객은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무인계산대를 없애며 고객 경험에 집중하는 줄 알았지만, 그 역시 기술에 집중했을 뿐이다. 아마존은 기술회사가 빠질 수 있는 함정,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가 절하된 인간의 노동
그렇다면 다시 현금없는 매장으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앞으로는 더 많은 기업이 비용 절감을 이유로 현금없는 매장을 운영할 것이다. 아마존 고와 같이 첨단 기술까지 적용하지는 않더라도, 무인계산대를 활용하여 바코드를 스캔하는 일을 노동자에서 고객에게 전가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불편한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용자 친화 경험을 내세우며 UI/UX를 개선하는 것에는 그토록 열심인 기업들이, 오프라인 고객 경험에서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이유는 비용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평가 절하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가치를 매기지 않으면, 앞으로도 기술은 이러한 편향성을 바탕으로 수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지금 당장 현금없는 매장은 줄을 서서 오래 기다리거나, 기계 앞에서 허둥대는 행위로 인해 불편하다. 더 나아가 생산성은 별로 향상시키지도 못하면서 노동자를 대체하는 자동화가 복잡한 인간을 한없이 단순하게 대체해야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우울해진다.
기계는 빠르고 정확하지만, 정해진 것 이외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인간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사회적이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적응해나간다. 그러나 인간의 자리를 기계가 대체한다면, 기계는 더 많은 것을 처리하고, 인간은 더 소수의 한정된 일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대규모의 데이터 수집과 끊임없는 자동화로 사회의 경제적 기반은 훼손될지도 모른다.
책 <권력과 진보>에서는 테크놀로지는 필연이 아닌 "선택"에 의해 편향성을 띌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현금없는 매장은 그 편향성으로 필연이 되어버린 현실을 보여준다. 지금 당장은 결제에 불과하겠지만, 향후에는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이 기계에 맡겨질지 모르겠다.
현금없는 매장이 편리함을 안겨주든, 불편함을 초래하든, 그것은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더 크게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거침없는 자동화와 집중된 부와 권력을 멈출 수 없는 시대에 공공의 이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비록 자본주의 세상에서 이미 정해진 경로를 이탈할 수는 없더라도, 한줌의 희망을 기대해 본다.
인간이 흔히 가정되는 것보다 무용하지 않고 기계가 흔히 가정되는 것보다 지능적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저 그런 자동화를 갖게 된다. 일자리는 대체되는데 기대되었던 만큼의 생산성 증가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기업들도 이러한 자동화에서 그리 이득을 얻지 못하며, 어느 경우에는 AI의 도입이 그저 AI에 대한 과장된 담론에 휩쓸려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p.457-458, <권력과 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