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일까, 교란일까.
애플은 2014년 애플페이를 시작으로 애플캐시, 애플카드, 애플페이레이터, 애플통장까지 최근 전방위적으로 금융서비스를 확대하며 금융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고작 이 중 하나인 애플페이가 3월21일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했을 뿐인데, 애플페이와 유일하게 제휴한 현대카드는 신규 가입자 폭증에 웃는 한편, 삼성페이 서비스 유료화 움직임에 전체 카드사는 긴장하고 있다. 과연 애플은 금융을 혁신하는 걸까. 아니면 시장을 교란시키는 걸까. 편의성에 비용을 지불하는 시대, 페이에 대해 알아보자.
결제는 패권다툼이 치열한 영역이다. 카드사업을 영위하지 않아도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토스페이 등 수많은 전자금융업자가 간편결제 시장 확대를 꾀하고 있다. 간편결제란, 카드비밀번호, 계좌번호 등의 결제정보를 사전에 해당 앱에 등록 후 결제 시 지문, 안면인식 등의 생체정보나 비밀번호 등 간편인증수단을 활용하는 모바일 결제서비스를 말한다. 한국은행 지급결제조사에 따르면, 2021년 간편결제는 80%를 넘어섰으며 특히 20~30대에게는 85% 이상의 높은 사용률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오프라인에서 간편결제는 어떨까? 네이버페이나 카카오페이 등은 QR코드를 이용하여 결제하고, 삼성페이는 카드리더기에, 애플페이는 단말기에 스마트폰을 가져다 대면 결제할 수 있다. 아무래도 QR코드보다 스마트폰을 가져다 대기만 하면 결제되는 방식이 편리하다. 그래서 휴대폰 제조업체인 삼성과 애플은 페이서비스를 연계해 간편결제 서비스를 공략했다. 다만 삼성페이는 마그네틱 보안 전송(MST) 방식으로 신용카드 리더기에서 결제 가능하고, 애플페이는 근거리무선통신(NFC) 방식으로 NFC단말기에서 결제 가능하다. 이쯤되면 발급받은 신용카드는 몇 안되어도, 페이앱 수십개가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깔린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애플페이는 토큰화 기술과 본인인증 수단을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다. 애플페이를 쓸 때마다 카드사가 무작위로 만든 16자리 토큰을 암호화해서 휴대폰으로 전송하고, 이 암호화된 토큰은 휴대폰에서 단말기로 전송된다. 단말기는 이 토큰을 다시 카드사로 보내 사용자의 토큰이 확인되면 비로소 대금을 청구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와 애플 모두 금융회사와 제휴를 통해 전자지급서비스 이용을 중개할 뿐, 금융당국이 규제할 수 있는 금융사업자는 아니다. 따라서 애플페이 서비스를 허용하면서 금융위원회는 카드사에게 개인•신용정보 도난, 유출 등으로 야기된 손해에 대해 책임지고 약관에 반영하는 등 소비자 보호방안 마련을 강구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삼성페이 서비스 관련 카드사 약관에도 이러한 내용은 명시되어 있다. 다만 삼성페이는 2016년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카드사에게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플페이가 현대카드에 결제 건당 0.15% 수수료를 부과하면서 카드사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용대가에 따른 수수료는 부과하면서, 리스크 발생 시 배상책임까지 카드사가 부담해야 하는 현실, 카드사가 규제차별을 주장하는 이유다.
카드사가 목소리를 내는 한편 간편결제 사업자들은 합종연횡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애플페이 상륙 전 삼성페이는 네이버페이와 손을 잡았다. 온라인에서는 삼성페이가, 오프라인에서는 네이버페이가 부진했으니, 둘의 제휴로 애플페이에 맞서는 전략이다. 그러나 삼성페이는 부족했는지 카카오페이 제휴도 논하고 있다. 삼성은 국내 간편결제 사업자 1,2위와 강력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는 셈이다.
반편 애플페이는 신흥강자 토스와 손을 잡았다. 2020년 LG유플러스 PG사업부를 인수하여 온라인 결제시장에 뛰어든 토스의 자회사, 토스페이먼츠는 애플페이 전자지급결제대행(PG) 파트너사다. 이들은 애플페이가 온라인에서 결제 가능하도록 한다. 또한 토스플레이스는 오프라인 결제 단말기 및 매장관리 솔루션 회사로서, NFC방식의 애플페이 결제를 지원한다.
토스는 최근 신세계그룹의 SSG페이와 스마일페이를 인수해 토스페이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여기에 애플페이 온•오프라인 결제를 지원한다. 2030세대 중심의 아이폰 유저는 토스의 주요 사용층과도 겹친다. 어쩌면 신흥강자 연합세력은 의외의 바람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삼성전자와 애플이 단지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페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 자체로 지갑을 대체하고 싶은 그들의 바램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삼성전자는 한국에서만 ‘삼성페이’ 일뿐, 글로벌하게 ‘삼성 월렛’이라는 명칭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디지털화된 개인정보, 결제정보, 자산 등을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보안 솔루션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2021년 애플은 아이폰 및 애플워치의 월렛 앱에 운전면허증 및 주정부 ID를 추가하는 기능을 출시했다. 현재 애리조나, 메릴랜드, 콜로라도, 조지아 4개 주에서는 이 기능을 허용하였으며 서비스지역을 확대 중이다. 삼성페이도 운전면허증 및 학생증을 모바일 신분증으로 등록할 수 있다. 빅테크는 결제를 넘어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지갑 멸종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애플은 최근 미국에서 골드만삭스와 제휴하고 4.15%의 고금리 저축계좌 상품을 출시하여 금융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금융 라이선스 없이 파트너십을 이용하여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조차 이제 애플이 잘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국내에서는 이제 시작이다.
금융은 규제 산업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보다 기존의 관행이 시장을 지배해왔다. 그런데 사용자 경험을 최우선 순위로 하는 애플이 아이폰 사용자에게 금융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더 이상 규제 장벽 뒤에서 혁신하지 않고 버티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고일지 모른다. 시장을 교란시킨다는 것은 규제 장벽 뒤에 숨어있는 이들의 항변에 불과하다.
새로운 경쟁자를 상대하기 위해 은행은 디지털 월렛, 카드사는 ‘오픈페이’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연합전선을 구축한다고 경쟁력이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 경험 및 중장기 사업계획이 고려되지 않은 디지털화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빅테크가 고객 결제 경험을 더 많이 축적할수록, 고객 연결고리는 강화될 것이다. 금융회사가 라이선스 사업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며, 새로운 자산을 구매하여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 대응해야 한다. 자원과 기회는 서로를 쫓아간다. 투자없이 혁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애플페이가 쏘아올린 공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