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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 nudge 이넛지 Jan 02. 2023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꿈과 정체성

"개인은 분열로 정의된다. 오페라를 관람할 때는 음악적 자아가, 일을 할 때는 야심찬 자아가, 가족을 돌볼 때는 인내하는 자아가 필요하다. 그 자체로 남는 것은 정체성 문제다" 
- 한스 게오르크 묄러&폴 J. 담브로시오, <프로필 사회>, 2022


"엄마는 꿈이 뭐야?" 

아들이 최근에 물었다. 한창 무엇을 할지 궁금한 나이가 된 탓이다. 자기는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서 대답하기 어렵다고 한다. 엔지니어도 되고 싶고, 유튜버도 생각 중이고, 우주비행사도 하고 싶단다. 

"와 좋겠다. 너는 꿈이 많아서." 

"왜? 엄마는 꿈이 없어?"

"아니, 엄마도 있지!"



직장을 10년 이상 다니다보면 다들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하루하루 톱니바퀴 구르듯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주변인들에게 꿈에 대해 물어본 적이 언제인지, 아마도 묻는다면 어젯밤 꿈풀이를 할지 모르겠다.


꿈에 대해 말할 때 보통 직업을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할지. 그래서 일을 한창 하고 있는 나이에 꿈을 말하려 하면 선뜻 말하지 못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어떤 일을 하고있다는 이유로 선뜻 꿈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준비하지 않는 한. 


한편으로는 100세 시대를 이야기하며 한가지 일에서 끝나면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인생 이모작, 삼모작의 시대라며, 이 일을 하고 난 뒤에 두번째 일도 생각해야 한다고. 그런데 막상 그 두번째 일이 무엇인지 들어본 일이 별로 없다. 일은 물론, 하고 싶은 것조차. 아니면 꿈조차도.



직장인의 꿈은 그렇다면 결국 그 조직에서 가장 높은 자리인건가. 연말 승진시즌이 도래하면서 설왕설래가 많다. 올해는 몇 프로 승진율을 기록할지, 평가방법이 어떻게 바뀐 것인지. 어떤 상사는 올해는 힘들다며 미리 친절하게 귀뜸을 해주기도, 어떤 상사는 입 꾹 다물고 마치 자신도 모른다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럴 때가 제일 힘들다고 '부서장'을 맡고 있는 친한 선배가 말했다. 그의 고충을 들어보면 계약직 신분인 자신의 자리도 사수하느라 힘에 부치는데, 함께 하는 직원들 역시 잘 챙겨야하므로 위아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다. 평가를 하는 이도, 받는 이도 모두가 힘든 것이 월급 받아가는 조직생활의 기본 전제 아닐까.  


승진대상이었던 나는 올해가 가장 기진맥진했던 해였다. 회사일은 풀렸다가도 다시 막히고, 집에서 엄마는 더는 못하겠다며 지방 이사를 준비했고, 남편은 내게 참아왔던 불만을 폭주하듯 이야기했다. 두 아이들은 집에만 들어서면 삐약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나는 늘 그들에게 '얼른 자자'고만 되뇌였다.


아마 그럴 때 승진이라는 강력한 모르핀을 처방해서 정신을 마비시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스마트하고 추진력 좋은 자아를 선보이기 위해 늘 머리에 불을 지피고 레이더망을 켰다. 조금 더 빠른 정보를 위해 수소문해서 물어보고, 인맥이 닿는대로 연락해보고, 해외 사례를 검토했다. 반면 집에서는 애들보다 더 빨리 잠에 들고 빨리 일어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자아였다. 주양육을 하고 계신 엄마와 아이들의 등원을 돕는 남편의 원성을 뒤로 해야 가능했다. 


회사는 실제로 집안일과 육아는 저 멀리 내팽긴것처럼 보이는 자아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내게 골프를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 어느 팀장의 물음에 '시간이 없다'는 대답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신 '저랑 잘 맞지 않아서요'라고 에둘러 대답했다. 지금 내게는 독서와 요가마저 출근시간과 점심시간을 이리저리 훔쳐내서 하고 있을 뿐, 그럴만한 여력이 없다. 정말 집안일과 육아를 주중에 거의 하지 않음에도.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내게 금기어다. 회사에서 그 말을 하는 순간, '아이들 좀 맡기고 하면 되지.' 부터 시작해서 온갖 조언이 쏟아진다. 아이들은 지금도 맡기고 있는데요...



승진발표가 있던 날, 남편은 아침부터 궁금해했다. 마치 나를 뒷바라지한 것 마냥 묻는 그에게 공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공로자는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우리 엄마지만. 


몇 년만에 다시 승진이라는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받으며, 나는 며칠 전 아들이 물었던 꿈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당당히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음을 대견스러워하며. 물론 내 대답이 승진은 아니었다. 


아들은 내 답변에 이렇게 말했다. 

"참, 재미없는거네."


나 역시 아들처럼 하고 싶은게 많다. 월급이나 승진이라는 진통제를 처방받으며 사는 직장인이기도, 누군가의 엄마, 딸, 아내이기도, 그 이전에 나라는 사람으로서도. 이 모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스스로 갖는 죄책감으로 생각이 많을 뿐. 


무엇을 손에 쥐고, 무엇을 손에서 놓을지, 그것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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