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 년간 6시 땡 퇴근하는 맛에 회사를 다녔는데, 2월 말에 맡은 일이 오십 년 동안 평화로웠던 나의 3월을 폭풍 속으로 몰아갔다.
어느 지방 도시를 대신하여 수백억 짜리 정부 공모사업 제안서를 써주는 일인데, 환경 관련 주제라서 채워야 하는 페이지 수의 압박감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채울 때마다 새로운 공부를 하는 고통이 적지 않았다. 3월 초부터 토요일에도 출근, 일요일에도 출근을 하지 않고는 진도를 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던 어제도 그랬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꼬박 회사에서 제안서 작업을 하다가 퇴근하다 보니, 일요일 오전에는 그냥 널브러져 있고 싶어졌다. 아내가 딸아이와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베란다에 살금살금 다가온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신문지 두장을 찬찬히 베란다에 깔고 그 위에 식탁의자를 올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11시. 의자에 기대앉아 새끼 고양이처럼 내 무릎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과 함께 호흡을 해본다. 단단한 상자 안에 숨어있던 행복감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기어 나오더니 턱밑까지 스멀스멀 밀려 올라왔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다가 바깥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우리 집은 5층이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오가는 동네 사람들을 관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수위실 왼편에 있는 분리수거 구역에 꾸준히 주민들이 들락거린다. 차를 닦다가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끄집어낸 빈 생수병 여러 개를 들고 오는 중년 남자. 유심히 바라본다. 그는 빈 생수병을 페트병 별도 분리함에 넣을까? 아니면 그냥 플라스틱 수거함에 버릴까. 그는 생수병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비닐을 벗기지도 않은 상태로 그냥 플라스틱 수거함에 무심히 던지고 돌아선다.
'흠, 실망스러운 남자군' 하던 중, 같은 성당에 다니는 토마스 형제님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셨다. 저분은 분명히 제대로 버리실 거야. 하면서 기대를 하게 되었다. 역시 그는 페트병의 위치를 정확하게 구별할 줄도 알고, 종이 박스에 붙어있는 비닐테이프를 분리한 후 수위 아저씨가 수고를 덜 수 있도록 박스를 납작하게 하여 가지런히 박스더미에 올려놓고 있다.
그의 딸이 뒤따라 종이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과연 그의 딸도 아빠와 비슷한 행동을 할까?' 몹시 궁급해져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무슨 야구경기 9회 말 투아웃 풀카운트에서 2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기대하는 심정으로 긴장을 하며 바라본다.
그의 딸은 박스를 척척 접어서 가지런히 박스더미 위에 올려놓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버려진 박스를 바라보다가 수신인이 적혀있는 라벨을 분리시키기 시작했다. 올타쿠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아내가 돌아왔다. 아내도 의자를 들고 나와서 앉았다.
"우리가 이 집에 이사 온 게 2003년이니 정말 이십 년 만에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앉아보네"
"그러게 말이야,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중정을 바란 적도 있고, 그래서 양평쯤 어딘가에 별장을 한 채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는데, 이러고 있으니 너무 좋다.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내와 조잘거리는 사이에 수위실 바로 옆 주차칸에 항상 주차를 하시는 벤츠 S클래스 주인 할아버지가 내려왔다. 이 분은 이 주차 구역에 상당히 집착을 하시는데, 차를 빼고 어디 갈 일이 생기면 가족 중 다른 사람이 같이 내려와서 차를 뺀 자리에 세컨드 카를 주차하게 하고 벤츠를 빼신다. 다시 돌아오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세컨드카가 자리를 비켜주고 원래의 자리에 벤츠를 주차하신다. '이분이 열심히 살아오신 선물 같은 벤츠인가 보다'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관찰 행동을 마치고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정신없이 3월을 흘려보내는 사이 어느새 하얀 목련은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고, 산수유는 겨자빛을 뽐내고 있다.
20년 만에 베란다 햇살과 함께한 마을 사람들의 모습들.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봄은 어김없이 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