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클래식한 접근, 클래식면도기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주었다면 이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남성에게는 매일 아침 면도를 해야 하는 '고통'까지는 아니지만 '번거로움'이 있다.
모든 남자들은 사춘기 2차 성징이 나타난 후부터 평생 거친 수염을 깎아내며 살아야 하고, 매일 밥 먹고 설거지를 하듯이, 매일 식사 후 양치를 하듯이 하루도 하지 않으면 개운하지 않을뿐더러 며칠을 거르면 세상 지저분한 얼굴로 추락하게 되고 조금 더 버티면 얼굴에서 산적두목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한다.
오늘 클래식 면도기를 하나 주문했는데, 나의 간단한 면도기 변천사를 돌아보다 보니 면도기 세계 시장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에 범위를 좀 넓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질레트 브랜드는 킹 C. 질레트(King Camp Gillette)가 1903년 세계 최초의 안전면도기를 선보였다. 이 2단 안전면도기는 얇고 강하며 날카로운 양면 면도날이 재사용 가능 손잡이에 부착되어 있는 형태였다. 이는 시장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질레트는 1971년에 2중 면도날을 사용한 최초의 안전면도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또 한 번 날아올랐다. 이후 3중 날에서 많게는 5중 날까지 출시하며 2010년까지만 해도 질레트의 미국 남성 면도기 시장 점유율은 70%를 넘어섰다.
마트의 계산대 옆에는 항상 질레트와 쉬크의 진열대가 있었고, 나의 선택은 언제나 질레트였다. 이중날은 삼중, 사중으로 변해가며 가격도 높아졌고, 언제가부터는 건전지를 넣어서 진동기능까지 추가된 것을 애지중지하며 사용했다. 헬스클럽에서 질레트 면도기 본체를 샤워 후 그냥 놓고 나온 적이 두어 번 있었는데, 다른 것들을 두고 온 것과는 다르게 절대 분실물 신고가 되지 않고 사라질 정도로 다들 귀하게 여긴 물건이었다.
질레트는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로저 페더러, 데이비드 베컴, 타이거 우즈, 리오넬 메시 등 당대 최고의 스포츠스타들을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문제는 이런 고급화 전략으로 인해 한 해 광고에만 6000만 달러(약 711억 원)의 돈을 썼고, 이는 면도기 가격이 올라가는 구조가 됐다. 한국에서는 박지성과 손흥민이 귀한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하늘 끝까지 올려놓았다.
2011년 구독경제 모델을 표방한 달러쉐이브클럽을 만든 마이클 더빈(Michael Dubin)이 제작료 500만 원짜리 광고에 직접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명 상표를 부착한 면도날을 사용하느라 매달 20달러를 쓰고 싶으신가요? 그중 19달러는 로저 페더러(질레트 광고 모델)에게 갑니다. 면도하는 시간을 아끼고 돈도 절약합시다."
구독경제의 등장 이후 질레트의 북미시장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50%선까지 추락하였다. 2018년에는 한국에서 '와이즐리'라는 구독경제형 면도기 회사가 만들어졌는데, 가격은 1/3 가격에 독일 기술로 만든 면도날을 광고하여 견고한 질레트 방어막을 뚫어버렸다. 2021년에는 한국 면도기 시장에서 10% 이상의 점유율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나는 2018년 와이즐리 출범 이후 질레트 대비 낮아진 가격과 동등한 품질을 즐기며 와이즐리 면도기에서, 쉐이빌젤, 애프터쉐이브로션으로 구입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고, 급기야 세네 가지 영양제까지 구독을 확대하며 만족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클래식한 것들에 묘한 매력을 점점 더 심취하게 된다. 이를테면, 커피는 수동 그라이더로 갈아서 드립 해서 마시고, 내 나이만큼 오래된 라디오와 진공관 오디오의 아날로그 사운드에 매료되고, 터치패드를 통해 조작을 기하는 자동차보다는 모든 버튼이 외부에 표출되어 눌러서 조작하는 자동차를 선호한다. 지난해 성탄절에 우체국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지방에 보내는데 우표를 붙이려고 했더니 직원이 깜짝 놀라면서도 반가운 표정으로 서랍 깊숙이 넣어둔 잘 찾지 않는 우표를 건네주던 기억도 있다.
종이책을 읽으며 사계절을 여러 번 거치며 숙성된 와인을 마시는 일도, 짱짱한 모터사이클보다 내 다리가 엔진역할을 해야 하는 자전거를 더 좋아하는 일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남자는 수염을 깎으며 살아야 함을 인식시켜 준 이는 아버지이다. 매일 아침 황동으로 만든 버터플라이방식의 면도기에 도루코 면도날을 끼워 면도를 하시는 아버지의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남자 어른'의 미래를 예감하곤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면도기의 아랫부분에 있는 노브를 돌려가며 마치 마징가제크 조종선을 날려 보내려는 듯이 양쪽 덮개가 열리고 닫히는 것을 보며 놀았다.
오랜 벗과 술 한잔 하며 그가 클래식면도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오랫동안 박제되어 있던 아버지의 추억에 봉인을 해제해 버렸다. 여러 가지 면도기를 기웃거리다가 결국 버터플라이형 면도기를 주문했다. 질레트에서 와이즐리로 오면서 면도날 카트리지 가격이 절반으로 낮아졌다면, 클래식 면도기로 이동하면서 면도날 교체비용은 1/5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단 하나의 면도날로 다치지 않게 면도를 하려면 더 세심하게 천천히 면도를 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기존 면도날 카트리지는 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가 밀결합 된 복합물질이다. 따라서 3주마다 카트리지를 교체하고 이를 버리려면 불가연성 폐기물(일명 투명봉투)에 버려야 한다. 이는 전혀 리싸이클링이 안되기 때문이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복합물질보다는 단일 물질로 이루어진 면도날을 사용하고 이를 철물 버리는 곳에 분리수거할 수 있어서 마음이 더 편안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