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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Dec 26. 2023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응원합니다

* 지학사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월간지 <고교 독서평설>에 한 해동안 글을 연재했습니다. 이 글이 올해의 마지막 연재글이에요. 보통 두 달 전에 원고를 드리기 때문에 지난 10월에 썼던 글이죠. 한 해 동안 열두 편의 글을 쓰면서 저도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 이곳에 올리는 글은 조금 더 제 마음대로 썼던 초안이에요. 표지그림으로 쓴 작품은 Jan Toorop의 <세 명의 신부>입니다.


철학자의 마음 상담소 – 2023년 12월호

12월의 질문: 벌써 또 한 해가 저무네요. 익숙한 곳을 떠나서 다른 세상으로 나가기가 조금은 두려워요.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일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흘렀는지 모르겠군요. 도통 시간이 안 가서 지루했는지, 아니면 눈 깜빡하니 12월이 되어버렸는지. 저는 이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마지막 연재라니 얼떨떨한 기분입니다. 공기 중에는 크리스마스의 온기가 묻어나고, 한 해를 접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되는 12월. 겨울로 시작한 2023년이었는데, 또다시 새로운 겨울로 2024년을 맞게 되네요.


   계절이란 매번 돌아오지만 매번 낯선 시간인 것 같아요. 익숙해진 여름에서 낯선 가을을 만나고, 가을의 껍질 안에서 익숙해지면 또 낯선 겨울을 만나고요. 그렇게 새로운 시간을 받고, 또 시간을 잃어가는 우리입니다. 오은 시인은 ‘계절감’이라는 시에서 “미련이 많은 사람은/ 어떤 계절을/ 남보다 조금 더 오래 산다”(《유에서 유》, 2016)라고 썼는데, 우리의 12월은 1년 가운데 가장 미련이 많은 달이죠. 지키지 못한 계획, 후회가 남는 시간, 흘려보낸 기회들. 이렇게 한 해를 또 보내다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고 당황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사실 별다를 것 없는 어제와 오늘인데, 그 사이에 새로운 해가 가로질러 들어가 작년과 새해로 나뉘다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해요.


   어떤 마음으로 새로운 해를 준비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대체로 학생일 테니,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롭게 공부를 지속하겠죠? 설레기도 하지만 걱정스럽기도 할 거예요.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에 놓이는 일은 아무래도 불안과 긴장이 따르는 일입니다.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건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아니,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익숙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듯도 해요. 이번 글에서는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나가기가 두려운 친구들에게 플라톤과 소크라테스, 두 할아버지의 응원을 전하려고 합니다.


   플라톤의 동굴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를 들어보았나요?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정의(正義)에 관해 사람들과 나눈 긴 문답을 책으로 남겼는데, 바로 《국가》라는 두꺼운 벽돌 책입니다. 질문이 많기로 이름난 스승님의 끈질긴 대화를 제대로 담으려면 도저히 얇을 수가 없었겠죠? 동굴의 우화는 이 책 7장에 들어있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이 우화를 간략히 설명해 볼게요.


   소크라테스는 이런 가정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지하 동굴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사슬에 묶여 벽 쪽만 바라보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요. 그들 뒤에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커다란 횃불이 타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불 사이에는 길이 하나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담장이 세워져 있어요. 누군가 담장 위로 물건이나 인형 같은 것을 들어 올리면 어떻게 될까요? 벽에 그림자가 생기겠지요? 여러분이 어렸을 때, 밤에 촛불이나 손전등을 켜 놓고 그 앞에서 손으로 토끼나 늑대를 만들며 연극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좋겠어요. 이렇게 누군가 그림자극을 하듯 벽에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소리도 내는데, 동굴 속 사람들은 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벽에 나타나는 그림자를 볼 뿐이죠. 묶여 있는 사람들은 그 가상의 이미지, 즉 그림자라는 허상을 진짜인 줄 알고 평생을 살아가지요.

제가 쓰고 김새별 작가님이 그린 철학동화책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에 실린 삽화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혹 사슬에서 풀려나 출구를 발견해서 동굴을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동굴 안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어떨까요? 일단 눈이 아프겠죠? 어두컴컴한 동굴 속 조도에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아마 추위나 더위를 느낄 수도 있을 거예요. 지하 동굴 속은 아늑하고 따뜻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눈이 멀 것 같은 태양빛과 새로운 온도에 적응하느라 괴로워하면서도, 이들은 진실을 향한 탐구를 멈추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사람들을 ‘철학자’라고 해요. 이들은 동굴 속에서 허상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짜 세상을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평생 그림자만 보며 살아온 동굴 속 사람들은 포근하고 익숙한 동굴을 벗어나려 하지 않아요. 오히려 벽에 비친 허상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믿지요. 따라서 내가 믿는 것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 즉 동굴이라는 나의 안온한 세계를 흔들며 새로운 가르침을 설파하려는 이들을 조롱하며 위협해요.


   이것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플라톤이 우리에게 건네는 동굴 이야기입니다. 영화 <매트릭스(1999)>를 본 적이 있다면, 이 영화에도 동굴의 우화가 깊이 스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주인공 네오 역시 매트릭스를 벗어나 진짜 현실을 직면한 뒤, 목숨을 걸고 되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매트릭스를 파괴하려고 하죠. 네오가 그랬듯이 편안하고 익숙했던 동굴 속 세상을 벗어나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가는 일과 같지요. 내 힘으로는 벅차고 부리도 얼얼하겠지만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내가 살 세상, 내가 놓인 참된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Warner Bros.


   동굴 밖에서 만나는 것들


   여러분도 누군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그것을 철썩 같이 믿으며 지낸 경험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네, 옛날 사람입니다.) 그때는 도덕 교과서에 북한 사람들을 주로 늑대로 그려 놓았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북한 사람들이 정말로 늑대인간인 줄 아는 어린이가 많았답니다. 믿기 힘들죠? 아마 비슷하게, 북한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과 조금 가까운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도 플라톤의 동굴 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스스로 소파에 묶여 머리를 스크린에 고정한 채, 누군가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소녀들은 오랜 시간 화면에서 보아온 여성들의 마른 몸이 아름답다고 믿기에, 그렇지 않은 몸을 비웃고 자신의 몸을 저주합니다. 표준 체중임에도 불구하고 뚱뚱하다고 믿으며 스트레스를 받죠.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만드는 사이비 교주들과 그 집단의 이야기도 동굴의 구조와 강도만 다를 뿐, 동굴이라는 본질은 비슷해요.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우리의 모습. 넷플릭스나 인스타그램 등으로 조금 더 업데이트 되어도 좋겠네요 :)

   그런 동굴을 벗어난 사람의 기분을 상상해 보세요. 처음에는 거부감이나 거리감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는 것은 그리 간단하거나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니니까요. (귀엽고 예쁜 동굴이지만, 여러분이 산타 할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아직 산타를 믿는 친구들이 있다면, 여러분의 생각이 맞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의 반성과 후회가 우리를 부쩍 키우고, 진실을 만날 때의 카타르시스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여러분은 평생 동굴 속에 묶여 지내고 싶은가요, 아니면 조금 힘들고 괴로워도 신선한 바람과 밝은 햇빛 속에 자유롭게 서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나요?    


   물론 모든 익숙한 것들이 다 플라톤의 동굴은 아닐 거예요.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편한 공간, 힘들 때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 몸에 잘 맞는 집밥, 이런 종류의 익숙함은 우리 삶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익숙함을 타파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익숙함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내가 안주하고 있는 곳이, 그 익숙함 때문에 내 눈을 흐리고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죠. 익숙함은 무척 힘이 세거든요.


   예를 들어 룰루 밀러의 논픽션《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1)》를 언급해 볼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싶은 친구들은 이 단락을 얼른 손으로 가리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 주세요!) 아름답고 비유적인 제목 같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스포일러는 바로 제목이에요. 어류라는 분류체계는 타당한 생물학적 범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관념은 학계 밖으로는 도저히 퍼져 나가지 않는다고 해요. 사람들은 직관을 사랑하기 때문에, 물속에서 지느러미로 헤엄치며 사는 길쭉한 유선형의 생물은 단순히 어류라고 생각하는 거죠. 오랫동안 가져온 믿음과 편안함, 익숙함을 진실과 맞바꾸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에요.


   소크라테스는 동굴 밖으로 나간 사람이 당장은 진짜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동굴에서 갓 나온 사람의 눈에 태양 빛이 가득 차면 눈이 부셔 그 무엇도 볼 수 없겠지요. 동굴 밖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면 또다시 ‘익숙해짐’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해요. 먼저 그림자들을 보고, 다음으로는 물속에 비친 상(象)을 보고, 실물은 그런 뒤에나 보고, 더 나아가서야 밤의 별빛과 달빛을, 그리고 결국 햇빛을 보는 겁니다. 오랫동안 쌓은 믿음이 견고해서 부수기 어렵겠지만 천천히 조금씩 부수어 나가는 거죠. 그렇게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통해 결국 지혜에 도달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삶은 껍질을 깨고 또다시 익숙해지는 일의 반복인지도 모르겠어요.  


   새로움과 익숙함


   여러분은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를 알죠? 나는 조금 보수적인 성향이야, 나는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졌어, 이렇게 스스로를 평가하기도 할 거예요. 이번 글의 주제인 익숙함과 새로움은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와도 깊이 연관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와 진보의 정치사회적 지형이 다소 엉뚱하기도 하고 말 자체도 굉장히 경직되어 있지만, 사실 이 두 단어가 담는 내용은 그렇게 흑백이나 빨강·파랑 같은 단순한 색깔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에요.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보수에도 진보에도 여러 가지 갈래가 있지만, 아주 쉽게 말하자면 보수는 대체로 익숙함과, 진보는 새로움과 관계된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둘 중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하며 상대를 비난하기 일쑤지만, 진정 보수다운 보수나 진보다운 진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이런 비난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짧은 지면에 진보와 보수에 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기는 어렵겠지만, 쉬운 말로 조금 풀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조금 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보수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해보면 좋을 것 같군요. 일단, 보수는 어떤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라기보다 경향이나 특성이라고 생각하면 좋아요. 그것이 나은 방향이기도 하고요. 마이클 오크숏(Michael Oakeshott, 1901-1990)이라는 영국 철학자는 어떤 경향이나 태도, 기질로서의 ‘보수적인 것(to be conservative)’을 신념이나 주의(主義, doctrine)로서의 ‘보수주의(conservatism)’와 구분하고 전자를 옹호하는데, 너무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좋습니다. 보수주의를 신앙처럼 견지하면서 삶을 관통하는 이론으로 만들기보다 어떤 문제를 접근하는 태도로서 ‘보수적’일 수 있다면, 그런 ‘보수주의적 태도’는 ‘보수주의’보다 여러모로 현명하고 유용할 거라는 거죠.    

Michael Oakeshott (1901-1990), 셜록 홈즈 같죠? 네, 영국 분입니다.

   전통적 보수는 인간의 이성적 사고가, 합리적 추론이 반드시 세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진보는 대체로 우리 사회에 어떤 청사진(blueprint, 원뜻은 계획이나 도면에 관련된 말입니다)을 제공하는 입장이에요. 세상에는 더 나은, 올바른 방향이 있다고 믿으며 우리가 그리로 힘을 합쳐 나가야 한다는 쪽이죠. 하지만 보수는 이런 종류의 옳고 그름을 반기지 않습니다. 뭔지 모를, 그래서 불안한 미래적 유토피아의 청사진보다는 인류가 그동안 구불구불 걸어온 모순 가득한 역사를 살펴보는 쪽이 낫다는 거죠. 어떤 도면이나 프로그램 같은 목표 없이 세상의 아름다운 모순들을 바라보고 다양성을 즐기자는 입장이므로, 원래는 중앙집권적 플래닝에 반대하는 태도를 가집니다. 집중화·중심화(centralization)를 경계하고, 주변부와 가치다원주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전통적인 보수예요.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단절이 아닌 연속성에 높은 가치를 두고, 일상이 익숙하게 꾸준히 이어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그러므로 예측가능성과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고 도덕성에도 진지한 태도를 가지죠. 어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의 모습과는 꽤 다르지 않나요?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 만들기 위해 손에 든 망치가, 낡은 것 안에 든 오랜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보수의 경고는 꽤 중요하고 묵직합니다. 사실 새로움 만큼이나 익숙함도 중요하고 아름답죠. 익숙함은 선악이라든가 옳고 그름, 효용이나 효율 같은 것을 넘어서는 차원의 가치를 지니기도 해요. 첨단 기술이 탑재된 태블릿에 수백 권의 전자책을 넣어 시시때때로 펼쳐보는 간편함이 좋다고는 해도, 어린 시절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부터 시작해서 내가 이런저런 메모도 하고 포스트잇도 붙여 놓은 최근의 책까지 모두 친구처럼 모여 있는 책장을 바라볼 때의 기분은 그런 기술로 얻기 힘든 것이니까요. 밀키트나 인스턴트식품이 간편하고 맛도 좋지만, 나의 익숙한 주방에서 익숙한 레시피로 오랜 시간 재료를 고르고 다듬고 익히고 기다려서 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익숙함과 새로움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 충분히 머물기를 바라요. 익숙함 속에서 소중하게 가져갈 가치를 찾아내고, 새로움 안에서 탐험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선을 고루 두자는 말이죠. 너무 저 앞에 놓인 것에만 시선을 두지 말고, 고개를 돌려 내가 지나온 것에도 다정한 눈길을 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눈앞에 놓인 것을 찬찬히 바라보고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진보적이면서도 보수적인 태도를 가진 균형 잡힌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어요.


   새로움이라는 불안에게 축복을


   동굴을 나오는 것도 좋고 진보와 보수도 다 좋은데, 새로운 곳에 놓이는 것은 여전히 불안하다고요? 여러분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는 유학길에 오르면서 참 많이 울었답니다. 비행시간만 거의 하루 가까이 되는 먼 길을 떠나야 하다니. 꿈꾸던 유학이었지만, 서른 가까운 나이에 그간의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혼자 놓이는 일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았거든요. 사랑하는 모든 것과 떨어져 작고 컴컴한 기숙사 방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그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말했듯, 새로움에도 결국 익숙해지더라고요. 새로움이라는 불안에 관해서라면, 시간은 분명 우리를 도와줍니다. 적응하느라 좌충우돌했고 또 많이 울었지만, 그때 떠나지 않았더라면 저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거라고 확신해요. 그래서 불안 속에서도 용기를 내 준 당시의 저에게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우리가 불안한 이유는 뭔가를 잘하고 싶기 때문일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 누군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을 멋지게 해내고 싶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게 마련이고, 그럴수록 불안은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토실토실 자라날 겁니다. 그럴 때는 프랑스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시 한 구절을 들어보면 좋겠군요. “잘하려는 것의 적은 가장 잘하려는 것이다(Le mieux est l’ennemi du bien).” 볼테르의 말을 조금 비틀자면, 저는 사실 꼭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여러분이 할 일을 하면 돼요. 새로운 곳이니 모르는 게 많을 텐데, 그러면 궁금한 일들에 질문을 던지기 바랍니다. 꼭 답을 찾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꾸준히,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요약하면 두 가지예요. 꼭 잘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답을 찾지 않아도 좋으니 질문을 던지는 것.


   “나쁜 질문을 던지면 답을 찾아낸다 해도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게 되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면 끝내 답을 못 찾더라도 답을 찾는 와중에 이미 멀리까지 가 있게 된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가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이라는 책에서 쓴 말입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을 탈출하는 법에서부터 비교의 사슬을 끊는 법, 함께 사는 사회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했고, 사랑, 웃음, 공부, 성별, 정의(正義), 인간의 본성, 신(神)과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고민했습니다. 그 달 그 달의 질문이 쌓여 여러분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한 번 돌아보세요. 비록 마음에 드는 답을 찾지 못했더라도, 질문의 힘만으로 여러분은 상당히 먼 곳까지 도달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신기한 것을 찾지 말고 당연한 것을 질문하세요. 거기에서 신기함이 또다시 새롭게 피어날 겁니다.


   여러분은 책상에 앉아 답을 쓰고 오답을 골라내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겠지만, 책상을 벗어난 세상에는 사실 정답이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도, 세상 일에는 대체로 정답이 없다는 거예요. 이 세상과 이 사회가 정답이라고 우기는 것들이 있겠지만, 그건 너희들 생각일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주 틀려요. 앞서 언급한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이 세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밝히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그러므로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나를 이끄는 힘은 끊임없는 생각과 질문이라는 것을 믿어보세요.    


   한 해 동안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느라 애썼습니다. 첫머리에 나이와 익숙함의 관계를 언급했죠? ‘푸른 봄’이라는 뜻의 청춘(靑春)인 여러분은 겨울에도 봄입니다. 나이에 관해서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특권층이죠. 하루하루 그 특권을 기쁘게 누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새로운 여정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할게요.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또 익숙해지러 나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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