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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Dec 05. 2023

신이 정말 있을까요?

니체 아저씨의 말을 들어보세요

* 지학사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월간지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하는 글로, 해당 월이 지나고 브런치에 올려둡니다. 원래 쇼펜하우어와 니체, 둘을 썼는데 내용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쇼펜하우어 부분을 통째로 들어냈어요. 책으로 만들 때는 두 철학자의 말을 다 들어볼 수 있도록 만들 예정입니다.


철학자의 마음 상담소 – 2023년 11월호


11월의 질문: 수능을 앞두고 백일기도, 새벽기도 다니시는 부모님이 많아요. 저도 시험 볼 때마다 온갖 신을 찾기는 하는데, 신이 정말 있다면 제 성적이 이 꼴일 수는 없습니다. 신은 정말 있을까요?


   신을 믿고 싶은 마음과 믿고 싶지 않은 마음


   여러분은 신(神)을 믿나요?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 생을 살다 보면 간절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일이나 중요한 시험 앞에서는 초월적 힘을 가진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면 부디 나를 이 고통과 불안에서 건져 주길 바라는 마음. 특히 오랜 기간 준비해 온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수능 시험을 두고는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거예요. 4대 종교뿐 아니라 올림포스 12신과 조상신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그쪽에서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진단 무심사로 나에게 은총을 내려주면 좋겠죠.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삶이 고통스러울 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아득함과 무력함을 느낄 때,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을 생각할 때,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거나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를 볼 때 (음?) 등등.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러 가지일 텐데요. 흥미로운 것은 신을 찾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 사이에 겹치는 이유도 많다는 점이죠. 예를 들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말문이 막힐 때, 어떤 사람은 종교에 귀의하여 신의 품에서 위로받는 쪽을 택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세상에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들 것입니다.


   삶의 기본값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드시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삶의 기본값이 불행과 고통이라고 믿는 사람이 늘 신을 원망하고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삶을 인간에게 선물한 신을 말이죠. 우리가 ‘신의 기본값’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신을 어떤 모습으로 상정하느냐도 중요할 거예요. 자애로운 신과 벌을 내리는 신. 둘은 사실 이어져 있겠지만 (신이 모두에게 자애롭기만 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세상은 엉망진창일 거예요.) 그래도 내가 그리는 신의 기본값에 따라 신을 믿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사이에는 모양이 꽤 다른 그래프가 그려지지 않을까요. 이렇게 보면 삶의 행복과 고통, 신의 존재를 믿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 사이에는 정말로 복잡한 생각이 다양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신: ................................


   나는 왜 신의 존재 여부를 묻고 있을까?


   신이 정말 있을까요? 저도 궁금합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질문은 논리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실증(實證), 즉 실제로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원래 존재를 증명하기 어려운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감정을 실증할 수 있나요? 그건 그냥 느끼고 믿는 것이죠. 마음을 열어서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수 없어서 답답한 이 고구마 같은 사랑. 하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세상에 사랑이 있다고 믿어요.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을 느끼고 믿는 사람에게 신은 확신의 대상일 거예요.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서는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답을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그 질문에는 개인적인 답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신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종교를 만든 건 인간이라는 사실이죠. 인간의 경험, 즉 다양한 삶의 경험이 종교를 만들고 발전시켰습니다.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걸 궁금해하는 것은 인간이에요. 그러므로 저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나는 왜 신이 있다고 믿고 싶을까?” “나는 왜 신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할까?” “나는 왜 신의 존재여부를 묻고 있을까?”


   여러분도 질문의 대상을 신에게서 나로 한번 옮겨 보세요. 선뜻 답하기 어려워 막막했던 이전 질문과는 달리, 이런저런 답변거리가 퐁퐁 솟아날 거예요. 그렇게 살짝 구부려 놓은 질문을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를 둘러싼 생각도 한층 깊어질 거고요. 많은 철학자들이 신을 향한 고민을 가슴에 묵직하게 품었던 이유도 비슷할 겁니다. 신을 향한 고민은 곧 나의 삶,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신과 철학의 관계


   사실 신과 철학은 관계가 깊습니다. 신과 인간의 만남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에요. 전지전능하며 무한한 존재인 신. 그에 반해 능력도 존재 자체도 유한한 인간. 신에 대한 사유는 늘 인간을 사유하는데 깊이를 더해주었죠. 신과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만나는지에 따라 서양문화권에서는 역사를 고대, 중세, 르네상스, 근대와 그 이후, 이렇게 큰 덩어리로 잘라 나누었습니다. 이런 구분은 서양철학에도 반영되어 신과 인간의 구불구불한 관계 곡선에 따라 시대를 구분하곤 하죠. 신학과 철학은 상당히 비슷한 질문을 공유하기도 해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종교와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를 아마 여러분도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거예요. 한쪽은 믿음의 영역, 다른 한쪽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니까요. 여러분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69–기원전 399년)가 사형선고를 받아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 거예요. 나라에서 사약을 내린 셈이죠. 그런데 그 죄목이 뭔지 아나요? 불경죄, 바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였죠.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소크라테스는 질문의 왕이었어요. 당연한 믿음에 새로운 각도로 질문을 던지고 또 던져서 결국 그 믿음에 균열을 내고, 그 틈 사이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심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일이었죠. 그러므로 사람들이 의심을 품기 좋았을 겁니다. ‘저 소크라테스라는 자는 믿음과 순종 위에 거(居)하는 신에게 정면으로 반하는 인물이구나,’ 하고요.


   하지만 한쪽은 믿음의 영역, 다른 한쪽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니까 불화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둘의 관계를 조금은 단순하게 이해하는 거예요. 왜 철학자들이 종교와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는지,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무신론자라는 의혹을 받았는지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소크라테스 이하 많은 철학자들이 정말 신을 믿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보다 중요한 것은 신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 시스템을 흔드는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이죠.

왼쪽부터 소크라테스, 홉스, 볼테르, 니체. 종교와 껄끄러운 관계에 놓였던 철학자들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습니다.

   종교는 한 사회 속 모든 도덕관념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계 어른들이 왜 존경받는지 생각해 보면 쉬울 거예요. 우리는 바로 그분들의 고매한 도덕성을 우러르는 것이죠. 종교는 이렇게 한 사회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무언가를 허락하고 금지하는 일과 필연적 관계를 맺는 것이 종교인 데다, 제정일치 쪽에 가까운 역사일수록 그 안에 사회적 권위가 내밀하게 얽히게 마련이죠.


   이런 배경에서, 신에 대한 도전은 곧 그 사회 시스템 자체에 대한 도전이 됩니다. 권력을 잡은 이들은 종교의 힘을 빌리거나 교계와 조화롭게 지내야 백성들을 통치하기 쉬웠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끈끈한 점성이 생기죠. 금지된 것에 관한 의문, 기득권을 향한 비판, 사회와 국가를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은 이런 상황에서 손쉽게 신에 대한 도전이자 사회의 안정을 뒤흔드는 불경한 질문으로 바뀌는 거예요. 따라서 끊임없이 “이게 최선입니까? 이렇게 밖에 못합니까?”를 외치며 사회에 쓰라린 질문을 던지는 게 사명인 철학자들이 종교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것은 예정된 결말입니다. 여러분께는 그중 단연 돋보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를 소개하려고 해요.  


   니체, 신은 죽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합니다. 올림픽에 ‘신께 도전하기’ 종목이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망나니들을 제치고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할 철학자가 바로 니체죠. 《도덕의 계보(1887)》라는 책에서 그는 지난 이천여 년간의 서양철학 전통을 단번에 깔아뭉개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특히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해요. 그 이유는 니체가 말하는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사이의 가치 전복’의 핵심 사례가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와, 주인도 노예도 도덕도 전복도 다 싫은데 넷을 붙여 놓으니 격렬하게 싫죠? (아, 전복은 좋다고요? 먹는 전복이 아니고 뒤집어엎는다는 뜻의 전복(顚覆)이에요. 다시 싫어진다고요?) 자, 단어들이 좀 낯설어서 그렇지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니니 차근차근 한번 따라와 보세요.


   일단 ‘주인과 노예라니,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하는 생각이 드는 친구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주인과 노예는 역사 속 진짜 계급을 일컫는 게 아니고 그런 정신의 소유자들을 말합니다. 주인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의미에 가깝고, 노예는 반대로 찌질하고 낮은 정신의 소유자 정도로 생각하면 돼요.


   주인들의 도덕은 ‘좋음(good)’과 ‘나쁨(bad)’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왜 좋은지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좋은 게 드러나는 것,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좋음이에요. 건강하고, 강하고, 탁월하고, 긍정적으로 흘러넘치는 가치죠. 나쁨은 그저 좋은 것의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면에 노예들의 도덕은 좋음과 나쁨이 아니라 선(good)과 악(evil)으로 구성돼요. 주인들의 ‘좋음’이 신발짝처럼 뒤집혀서 ‘악’으로, 주인들의 ‘나쁨’이 빈대떡처럼 뒤집혀서 ‘선’으로 바뀌는 게 특징입니다. 뛰어난 게 별로 없는 노예들은 대체로 삶도 고달프기 마련이에요. 그런 힘겨운 삶 속에서 위안을 찾을 방법을 모색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치의 전복’이죠. 나의 약함이 못난 게 아니라 사실은 성스럽고 귀한 것이며, 참고 순종하며 견디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라는 식의 생각을 말합니다. 즉, 노예들은 주인들의 자신감이나 찬란한 자기 긍정을 건방지고 무모한 것이라며 ‘악’의 굴레를 씌우고, 대신 인내심, 겸손과 겸허, 고난을 참고 견디는 능력 같은 것을 '좋은 것', 더 나아가 '선한 것'으로 내세우는 거죠. 쉽게 말해서 가치 전복은 ‘정신 승리’에 가까워요. 탐스런 포도나무 밑에서 미친 듯이 점프를 하다가 포기하면서 ‘내가 점프를 못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저 포도가 시어서 안 먹는 거야’하고 생각하는 여우 같은 거죠.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사이의 가치 전복, 제가 앞발로 그려보았습니다

   아까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런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사이의 가치 전복’의 핵심 사례가 기독교이기 때문이라고 했죠? 그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는 집단 최면을 통해 빛나는 내세를 만들어 두는 대신, 우리가 현실의 삶을 너무 고달프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좋은 것들은 전부 내세로 미뤄 놓고, 참고 견디고 순종하면 결국 죽어서 그것들을 누릴 거라고 약속한다는 거예요. 현실의 삶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학대(원죄의식이라든가 금욕주의)를 행하면서, 이것이 바로 선이며 자유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간 인간 이성이 쌓아온 자유의지라는 것은 사실 이런 허위의식을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자학적 착각에 불과한 거라고 니체는 일갈해요.


    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신의 죽음은 단지 종교로서 기독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신처럼 떠받들어온 모든 것들, 즉 서구의 전통적 가치와 권위들, 삶의 의지를 억압하는 그 모든 왜곡된 가치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것이죠. '신의 죽음'이라는 선언은 그러므로 단순히 가벼운 무신론의 선언이 아니라, 수천 년 간 쌓아온 인간의 이성과 도덕률에 대한 묵직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신의 자리에 인간을


   니체는 그렇게 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억압적인 도덕과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인간을 놓습니다.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이상한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드라마 <스카이 캐슬(2018)>을 본 친구들이라면 독서 토론회에서 예서가 자기도 위버멘쉬가 되겠노라며 잔망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장면을 기억할지도 모르겠군요. 위버멘쉬는 말 그대로 '뭔가를 넘어선(über) 사람(Mensch)'을 말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기존의 통념이나 도덕 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긍정적으로 창조해 내는 사람. 신과 같은 초월자나 절대자가 없이도 스스로 건강하고 의미 있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인(主人)적인 인간을 말해요.


    소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널리 알려진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의 비유입니다. 낙타는 가장 밑바닥의 노예 같은 존재예요. 자기 것도 아닌 남의 짐을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타 같은 삶을 살지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 ‘왜?’를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왜 이런 구속을 따라야 하는지, 세상 곳곳에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거죠. 이런 의심과 반성적 사유를 통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훌훌 내던져버리는 사람, 그래서 바람 같은 자유를 얻은 사자로 한 단계 고양되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큰 소리로 불호령을 내리며 세상을 향해 “No!”를 외치는 사자에서 멈춘다면 세상 모든 것에 엑스표를 그리는 엑스맨이 되거나 세상만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겠죠? 파괴와 부정의 정신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만물을 유쾌하고 성스럽게 긍정하는 어린아이의 단계로 한 차원 더 나가야 하는 거예요. 파도에 허물어지더라도 깔깔 웃으며 또다시 모래성을 쌓아 올리는 아이, 생을 온몸으로 감각하며 긍정적으로 무엇인가 끊임없이 창조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로 바뀌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전형이에요. 신은 죽었으므로 신의 위치를 향해 스스로를 드높이는 삶을 살라는 거지요. 그래서 니체는 모든 사람들이 위버멘쉬가 되라고, 아이가 되라고 말합니다. 김연자 언니의 ‘아모르 파티(amou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처럼 내 삶을 사랑하면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금 내게 주어진 생을 벅차게 사는 존재, 그들이 바로 위버멘쉬예요. 삶이란 것은 사실 끊임없는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 같은 것입니다. 무너졌다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즐겁게 쌓아 올리는 아이, 친구를 데려와서 다른 방식으로도 쌓아보고 또 무너지면 깔깔 웃는 아이처럼 사는 삶, 어떤가요?

니체의 인간 정신의 3단계. 이렇게 뱃지 상품으로도 나와 있군요 :)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은 우리 안에


   마지막으로 <브루스 올마이티(2003)>라는 영화에 나온 인상 깊은 대화를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어요. 이 영화는 '평범한 인간이 신이 된다면?'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아주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인데요. 거기에서 신이 이렇게 말합니다.


 “수프를 가른 건 [필자 주: 영화에서는 잠시 신의 능력을 얻은 주인공이 빨간 토마토 수프를 홍해처럼 가르는 코믹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기적이 아니고 속임수 마술에 불과해. 투잡을 뛰는 미혼모가 아이를 축구 시합에 보내려고 없는 시간을 짜내는 게 기적이야. 십 대 청소년이 마약을 거부하고 공부를 한다면 그게 기적이지.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지니고도 그걸 까먹고 나한테 소원을 빌어. 기적을 보고 싶나? 자네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보게.”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신의 능력을 얻은 주인공이 빨간 토마토 수프를 홍해처럼 가르는 장면 ©Universal Pictures

    마술(magic)과 기적(miracle)의 차이, 느껴지나요? 영화 속 신은 거듭 말해요. 기적을 만드는 건 신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기적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이 말에 따르면 사실 신은 기적을 행할 필요도, 이 세상에 개입해 능력을 과시할 이유도 없어요. 이 영화는 세상에서 신이 사라져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그 누구도 아닌 신의 입을 빌어 표현하죠. 신이 있으면 더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일단 우리 힘으로도 그럭저럭 멋있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인 거예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번 수능 시험에서도, 여러분의 삶에서도 기적을 만들어 보세요. 저는 기도하는 마음을 보태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결과를 얻기를,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부디 모래성을 쌓는 아이의 마음을 기억하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그리고 학생들이 치른 올해의 수능은 많이 어려웠다고 하죠. 아래는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자석입니다. 실은 니체보다도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음이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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