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다 할 건데 우리는 뭐해요?

데카르트와 소크라테스가 미래사회에 전하는 조언

by 이진민

* 지학사에서 발행하는 청소년 월간지 <고교 독서평설>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썼습니다. 황급한 마무리가 느껴지실 거예요. 책으로 만들 때는 충분히 써서 싣도록 하겠습니다.


철학자의 마음 상담소 – 2023년 6월호


6월의 질문: AI 모델이나 가상현실 같은 걸 보면 정말 진짜 같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일까요?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면 우리는 뭘 해야 해요? 알 수 없는 미래가 두렵기도 해요.


사람 같은 가상 인간, 나보다 공부 잘하는 인공지능


여러분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AI로 칭함)은 무엇인가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 지능, 즉 natural intelligence와 구별되는 AI는 인간의 학습·추론·지각 능력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컴퓨터 과학의 세부 분야입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AI 기술은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있지요. 딥페이크 기술로 탄생한 버츄얼 휴먼이 인플루언서가 되어 광고를 하고 유튜브 계정을 운영합니다. 유명을 달리한 가수가 되살아나 팀 멤버들과 완전체로 노래를 불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가상 인간들은 쇼 호스트나 아나운서로도 등장하고, 유명 배우의 젊은 시절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지나 이제 인간과 쉽게 구별하기 어려워진 그들의 모습에 저는 요즘 자꾸 제 눈알을 의심하고 있어요. 스크린 속 이미지는 이제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 가상인지 쉽게 판별하기 어렵습니다.


*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인간형 로봇에서 우리가 느끼는 이질감에 관한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의 주장을 담은 용어. 인간의 형체를 띄는 존재가 인간을 닮아갈수록 차츰 호감도가 높아지는데,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이 오히려 호감도를 대폭 하락시켜 그래프의 해당 구간이 골짜기를 닮은 데서 유래했다.


한편 미국의 인공지능 연구소 OpenAI에서 개발한 대화 전문 인공지능 챗봇 'ChatGPT'는 생일 파티 아이디어나 독서모임 진행법 같은 창의적 사고가 필요한 질문에도 꽤 그럴듯한 답을 내놓아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혹시 심심이, 이루다 같은 챗봇과 대화해 본 적 있나요? 이제 대학에서는 과제를 하는 것이 학생들이 아니라 챗봇일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하지요. 2016년 큰 화제가 되었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국을 기억하는 친구들이 있을 겁니다. 구글 전 CEO 에릭 슈밋은 “누가 이기든 그것은 인류의 승리”라고 했지만,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간에 대한 기계의 승리로 받아들이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요.


이제 AI는 번역도 하고 책도 쓰고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립니다. 당연히 나보다 공부도 잘하겠죠. 수능을 보면 분명 고득점을 척척 받을 거예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안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래 사회에는 기계가 뭐든 나보다 잘하는 게 아닐까? 열심히 공부해서 꿈을 이뤘는데 그 직업이 사라지면 어쩌지? 사람들이 AI 시대에 대체 가능성이 높은 직업들 리스트를 데스노트 살피듯 확인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거예요. 이번 글에서는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모를 세상에서 AI가 나를 대신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이 생기는 친구들에게 두 명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와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기원전 399년)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실재하는 것일까?


이 세상이 진짜 존재하냐니, 이게 무슨 PC방에서 수학 문제집 펴는 소리냐고요? 헛소리 같지만, 뭔가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입증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떡볶이 한 접시가 놓여있다고 해보지요. 장미보다 고혹적인 빨간색, 피톤치드보다 우월한 치명적 향기, 코에 따뜻하게 느껴지는 훈훈한 김까지, 이게 가짜일리 없습니다.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은 분명 떡볶이가 맞다고 우리의 눈과 코가 입을 모아 말하고 있어요. (눈과 코가 입을 모으다니 괴기스럽군요.)


하지만 우리 감각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말할 나이는 아니겠지만, 분명 차갑다고 생각했던 수영장 물이 수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미지근하게 느껴진 경험이 있을 거예요(이상한 생각은 금물입니다. 수영장 가기 전에 꼭 화장실을 들르길 바랍니다.). 떡볶이의 저 고귀한 레드는 정말 빨강일까요? 적록색맹이 있는 사람에게는 떡볶이 떡이 꼭 브로콜리 줄기처럼 보일 거예요. 색맹이 아니더라도 조명에 따라 갈색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냄새와 맛은? 일단 감기만 걸려도 당장 혼란스러워지는 영역입니다. 아보카도를 김에 싸서 와사비 간장에 찍어먹으면 참치회 맛이 난다고 해서 한때 다이어트식으로 각광받은 적이 있어요. (원효대사 해골물 다이어트, 여러분도 관심 있으면 도전해 보세요.)


감각은 이렇게 속이기 쉬운 영역이고, 우리가 뇌에 입력하는 정보도 주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덴마크 심리학자 에드거 루빈(Edgar Rubin)이 고안한 ‘루빈의 꽃병(Rubin's Vase)’ 같은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꽃병으로도,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로도 보이니까요. 그러므로 같은 것을 보고도 누구는 꽃병을, 누구는 두 사람의 옆얼굴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렇게 하나씩 의심해가다 보면 내 앞에 놓인 것이 과연 떡볶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출출한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워집니다.

左: 루빈의 꽃병/ 中: 이것도 보기에 따라 노파와 젊은 여인으로 보이는 유명한 그림이죠/ 右: 최근 제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뜬 티셔츠 광고입니다 :) geeksoutfit.com

데카르트도 비슷한 방법으로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차례차례 의심했어요. 철학의 확고한 기초를 세우고 싶었던 그는 일단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의심해 보기로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있는 장소, 2+2=4라는 수학적 명제까지,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명대사처럼 의심하고 또 의심했어요. 나의 육체까지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단 한 가지,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없는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문장, 바로 데카르트 인식론의 핵심이 되는 문장이지요.


제가 데카르트를 불러온 것은 그가 이 명제에서 출발해서 그 위에 차곡차곡 연역적으로 쌓아가는 논리들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의 감각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믿기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꼭 인공지능이나 가상현실이 우리 감각을 홀리지 않아도, 우리는 원래부터 완벽하게 믿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어요. 현실처럼 꾸며진 스튜디오 안에서 살고 있었던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혹은 시뮬레이션의 세계 속에서 꿈을 꾸고 있었던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믿을 근거가 사실 없는 것이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고 싶은가


아니 당장 내 앞에 있는 떡볶이가 이렇게 맛있는데 이게 착시든 환상이든 다 무슨 상관이냐고요? 나는 행복하니 거 좀 조용히 하라고요? 원효대사님께서 삼삼칠 박수를 치실 만한 아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실존을 입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결국 가치 부여가 중요해진다는 사실이죠. 감로수라고 생각하고 마시면 해골에 고인 물도 시원하고 달콤한 법입니다. 아까 똑같은 그림을 두고 각각 잔을 보는 사람들과 옆얼굴을 보는 사람들 이야기를 했지요? 우리는 이렇게 보이는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주관적 판단을 내리며 이 세상을 해석합니다. 거짓도 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에요.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죠. 번화가 한복판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말을 세 번 들으면 안 믿던 사람도 믿게 된다는 뜻으로, 다수가 우기면 없던 호랑이도 생긴다는 겁니다. 종교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입증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다수의 확고한 믿음이 그것을 참이라 생각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 세상이 실재하는가 아닌가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가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것을 진실로 믿는지, 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마음이 있는지, 그런 것들 말이에요. 당장은 우리 눈앞의 가상현실과 실제 세상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지만, 기원전에도 현재에도 변함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싶어 하고 어떤 것을 믿으려 하는가’라는 겁니다. 가상현실이 구현해 내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것들이니까요. 그것이 그리운 추억이든, 필요한 인간의 모습이든, 아니면 더러운 범죄로 이어질지 모르는 딥페이크 영상이든 말이죠. 기술은 끊임없이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고, 가상현실을 실제와 구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또 이에 휘둘리지 않도록 돕는 기술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삶일까


그러므로 결국 중요해지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삶’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떤 삶이 기쁘고 행복할까, 이런 고민이 중요해지는 거죠. 기술의 발전은 그런 청사진을 돕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모기들의 세상에 인공지능이(문(蚊)공지능…?) 있다면 그 기술은 아마 주거침입의 미학, 효율적인 유기농 흡혈, 느린 인간 선별법, 이런 것들을 향해 가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인간인 우리는 어떻게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과학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요?


효율성과 생산성을 따진다면 오류를 제거하고 보다 편리해지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겁니다. 예를 들면 병충해에 강하고 맛 좋은 작물, 시간을 단축시켜 주는 기계와 로봇들, 대량 생산에 최적화된 시스템, 이런 것들을 갖추는 방향으로요. 하지만 효율 뒤에는 종종 슬픔이나 위험이, 편리함 뒤에는 대체로 상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바나나 품종을 개선해 나가다가 결국 우량 단일종으로 만들어 환경 파괴에 일조하고 바나나 멸종 위기를 초래해 버렸지요. 무인 키오스크의 효율 뒤에는 일자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과 그 앞에서 허둥대는 어르신들이 존재합니다. 빠른 시간에 척척 옷감을 짜내는 기계가 있으니 이젠 할머니가 손수 짜 주신 목도리 같은 건 없어져도 좋을까요?


과학의 시대에 철학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철학은 어떻게 하면 삶을 최대한 잘 살 수 있을지 묻고 또 묻는 일이니까요. 고대에는 사실 철학과 과학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대체로 과학자이기도 했지요. 근대까지도 뉴턴, 데카르트, 베이컨 같은 이들 모두가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이 철학의 손을 뿌리치고 저만치 달려가고 있어요. 생화학자이자 유명한 SF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는, “현재 인간 삶의 최대 비극은 우리 사회가 지혜를 모아서 쌓아 올리는 속도보다 과학이 지식을 긁어모으는 속도가 훨씬 빠른 점”이라고 합니다. 앞서 바나나의 예에서 보듯, 그리고 스마트폰이 바꾸어버린 우리의 일상에서 보듯, 과학기술이란 건 우리 삶의 토대를 통째로 바꾸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늘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해요. 과학이 인간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에 대해 따듯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도록, 때로는 제동을 걸고 때로는 받쳐주는 것이 철학이어야 합니다.


느린 속도로 궁금해하기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한다는 말에 “저 부르신 분?”하고 손 들며 등장할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질문의 왕 소크라테스예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한마디로 질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소크라테스는 대화에 전념했기에 책은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모두 제자 플라톤이 남겨놓은 것들이에요. 그는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을 붙들고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잡히면 집에 갈 수가 없었어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산파술’이라고 하는데,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개념을 찬물에 넣었다 더운물에 넣었다 붉은빛을 비췄다 푸른빛을 비췄다 하면서 끈질기게 다각도로 살펴보는 겁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받다 보면,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문득 낯설어지고 오류가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런 순간을 ‘아포리아’라고 해요. 산파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것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옆에서 돕는 산파의 역할과 같기 때문입니다.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죠.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걸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장군은 용기가 무엇인지 몰랐고, 시인은 시를 정의 내리지 못했다고 해요.


자, 우리 한 번 기술의 편리함을 가지고 테스 형과 대화를 나눠볼까요. 소크라테스(소)와 독자들(독) 사이에서 마치 소떡소떡처럼 아름답게 꿰어지는 짧은 대화를 만들어 보죠.


소: 기술은 편리한 것인가요?

독: 네. 이제 스마트폰에 모든 기능이 다 있어서 그것만 들고 다니면 되니까 좋아요.

소: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집을 나왔는데 당장 대중교통도 못 타고, 결제도 못 하고, 길도 못 찾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와 연락도 할 수 없으면요? 갑자기 너무 불편하지 않나요?

독: (뭐래… 안 잃어버리면 되지…) 그럼 수첩에 필기구에 지갑에 시계에 노선도와 지도까지, 그런 것들을 모두 둘러메고 다니는 것이 편리한 것인가요?

소: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있을 때는 편하지만 없으면 치명적으로 불편해지는 물건이군요.
있을 때는 편리하지만 없어지면 당장 불편함이 배가 된다면, 그래도 우리의 편리가 늘어난 것일까요? 무엇에 의존하는 일은 편리한 것인가요?

독: (짜증…) 없을 때는 불편해도, 있을 때 너무나 편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써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쓴다는 것은 좋다는 말 아닐까요?

소: 나이 든 어르신들도 이것을 편리해 하나요? 다수가 편하면 소수는 불편해도 좋을까요?
독: 근데 저 집에 가면 안 돼요?


더 길게 늘어질 수 있지만 여기서 잘라봅니다. 이 대화를 통해 편리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편리함의 이면에는 의존의 문제가 따른다는 것, 편리함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주제와도 연결된다는 것 등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의존하지 않는 삶, 서투를 수 있는 삶이 ‘좋은 삶’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특정 조건에 놓인 사람을 편리함의 기준으로 삼는 일은 누군가의 삶의 조건을 불편하게 (때로는 위협적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렇게 세세히 고민하지 않는 것이 편리하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기술은 그쪽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집에 좀 늦게 가더라도, 이렇게 느린 속도로 궁금해하는 것을 멈춰선 안 되는 것입니다. 우주학자 칼 세이건의 말처럼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에요. 척척 해결해 주는 것 같은 인공지능의 세상에서 우리가 더욱 질문을 놓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질문이 가리키는 곳


대체로 우리는 질문을 더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기보다 문제를 해결해서 질문을 지워가는 것을 선호해요. 진지함보다는 즐거움을 좋아하고요. 하지만 재미없다고 해서 꼼꼼하고 느리게 질문하는 일을 놓아버린다면, 우리는 방향을 모른 채 달려가야 합니다. 정보를 구하는 질문(‘사랑’은 아랍어로 어떻게 쓰지?)보다는 의미를 구하는 질문(사랑이란 도대체 뭘까?)을 진득하게 해야 해요. 우리는 결국 질문 속에서 발견을 하고 돌파구를 찾아내기 때문이지요.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 기계와 인간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튜링 테스트(Turing test)*를 제시한 1950년의 논문은 바로 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논문이 나온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기계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지 여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어요. 중국어 방(The Chinese Room) 이론*에 따라 그저 기계식 산출일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챗봇과의 대화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농도가 짙어질수록 우리는 혼란스럽죠. 최근 벨기에의 한 젊은 남성이 몇 주 동안 엘리자라는 챗봇과 대화를 나눈 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인간이 영향을 받는 한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혼란 가운데서 데카르트를 떠올리면 어떨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은 ‘나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도 즐겁게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 튜링 테스트(Turing test): 튜링에 의하여 고안된, 기계의 지능을 시험하는 방법. 사람을 격리된 방에 두고 상대방과 대화하도록 하는데, 이때 대화 상대는 물론 컴퓨터이지만 대화에 임하는 사람은 자신이 기계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대화를 진행하도록 한다. 이러한 대화 과정에서 사람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컴퓨터가 최소한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고 판단하는 방법이다.


* 중국어 방(The Chinese Room) 이론: 미국 철학자 존 설(John Searle, 1932~)이 튜링 테스트에 대한 반박으로 고안한 사고실험. 어느 방 안에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을 넣고, 중국어를 변형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그램 지시가 적힌 책과 필기도구를 제공한다. 이 상태에서 중국인 심사관이 중국어로 질문을 써서 방 안으로 넣는다면, 참가자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더라도 책을 토대로 알맞은 대답을 중국어로 써서 심사관에게 건네줄 수 있다. 문답이 잘 이루어져도 이 사람이 정말로 중국어를 알아서 대답하는 것이 아니듯, 기계가 튜링 테스트를 거치더라도 그게 지능인지 모방인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인공지능이 다 할 건데 우리는 뭐해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을 하고, 철학을 하는 겁니다. AI 시대에 경쟁력 있는 인간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협에 맞서서 “우리가 꼭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 경쟁력이 없더라도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만들면 안 되나요?” 같은 질문을 꿋꿋이 던져야 합니다. 인간의 서투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의 삶이 기술에 눌려 납작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요.


기술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폭주할 수 있는 과학의 멱살을 잡고 책임을 고민하는 것은 우리여야 해요. 디지털 시대에는 우리의 자유, 평등, 정의, 사랑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어떤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는지, 그리하여 결국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말한 속도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의 꾸준한 거북이가 되어야 해요. 빠르게 내달리는 과학기술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질문과 사유가 느리고 꼼꼼할수록 오히려 속도 제한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데카르트 이후로 기존의 ‘신’ 중심의 철학은 점차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으로 대변환을 이룹니다. 그렇게 인간이 중심에 놓이는 세상으로 미래를 가꾸어 갈 수 있도록, 기술 중심의 세상에서 인간이 밀려나지 않도록, 인간이 제어권을 단단히 손에 쥘 수 있도록, 의심하고 또 의심합시다. 소크라테스도 짜증을 낼 때까지 질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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