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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Feb 27. 2024

독자들을 만나는 기쁨

이벤트에 진심인 편

   오늘은 독자들 자랑을 좀 해보려고 합니다. 제 책이 독자들에게 가 닿은 모습을 목격하는 일은 아직도 부끄럽고 민망하지만(책을 꽤 냈는데도 아직 극복이 안 됩니다. 엉엉.), 그래도 역시 글 쓰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글을 읽고 좋아해 주는 분들을 만날 때인 것 같아요. 제 책에 밑줄이 그어진 모습을 본다거나, 색색의 포스트잇 플래그가 붙은 모습을 본다거나, 책을 읽고 감상을 전하는 글들을 만날 때, 저의 반응은 주로 네 가지 단계를 거치는데요. 첫 번째 당황, 두 번째 부끄러움, 세 번째 감사, 네 번째 반성(잘하란 말이다), 이렇게 층층이 4층 석탑을 완성하곤 합니다.


   책을 낼 때마다 마음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외계인을 위해 바흐의 음악을 골라 실었던 보이저 호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과연 내 책이 우주를 떠돌다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지, 그렇게 미지의 존재와 만날 수 있을지, 과연 내 글은 음악이 될지 소음이 될지, 내 책의 독자는 정말 외계인처럼 상상 속의 존재인 건 아닐지, 그렇게 최대한 마음을 내려놓고 책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편입니다.


   작년에 고교생 대상의 잡지에 글을 연재하고,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철학 동화책을 펴낸 이후로는 다른 차원의 의문이 생겼어요. 성인 독자들은 그래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가끔 존재를 확인하곤 하는데, 내 책을 읽어주는 어린이·청소년 독자가 과연 정말 있을까? 외계인은 있을 법도 한데(이 광활한 우주 안에 생명과 문명이 이것뿐일 리는…), 어린 독자들은 그야말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니콘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있었습니다. 갸악.


   오늘은 제 독자님 중에서 가장 푸릇푸릇한 독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작년에 인스타그램에서 #저자여빙의하라라는 이벤트를 하나 진행했는데요.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에 나온 열세 명 중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를 뽑으면, 제가 그 철학자에 빙의하여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포스팅으로 띄워주는 이벤트였습니다. 연말에는 그 메시지를 편지로 만들어서 독일 까까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주었지요.

차례로 제 책 속 플라톤, 슈클라, 밀, 롤스, 장자, 몽테스키외, 공자, 마루야마 마사오, 홉스, 보부아르, 마르크스, 루소, 푸코입니다. 너무 귀엽지 않나요.

   얼마나 멋진 글에 답장을 해 주었는지 자랑하고 싶어서 이걸 올려야지 올려야지 하고는 결국 2월이 다 지나서야 올리네요. 엄마 미소로 함께 읽어 주세요 :)


   먼저 춘천에 사는 연호 어린이의 글과, 거기에 플라톤 할아버지가 답장한 내용입니다. 제가 가장 처음으로 어린이에게서 받은 감상문이었는데요,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아니 대체 뉘 집 자식이냐며 감탄하는 분들이 많았지요.

   연호 어린이 안녕하세요.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를 재미있게 읽어 주어서,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제가 이야기한 ‘동굴의 우화’를 인상 깊게 봐주어서 무척 기뻐요.


   좁은 세상에서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는 메시지를 찰떡 같이 알아봐 준 연호 어린이의 지혜에 감탄했답니다. 게다가 축구나 일상생활과 관련해서 들어준 비유가 어찌나 훌륭한지, 무릎을 탁 치고 말았지요. (아이고 관절이야.)


  연호 어린이는 축구를 아주 좋아하나 봐요. 축구가 ‘하패스톤’이라는, 이 할아버지가 살던 고대 그리스의 공놀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몸을 튼튼히 하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지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도 펜싱을 굉장히 잘했다고 해요.


   저는 어떤 운동을 즐겨했는지 맞춰 볼래요? 관절이 아픈 할아버지가 무슨 운동이냐고요? 허허, 저는 사실 장래가 촉망되는 레슬링 선수였어요. 제 이름인 플라톤도 사실 본명이 아니랍니다. 우리 레슬링 코치가 나보고 어깨가 넓은 놈이라면서 붙여준 별명이 플라톤이에요. 저는 학문이 더 좋아서 철학을 하게 되었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몸은 내가 끈기 있게 생각하고 토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아빠가 일주일 안에 책을 다 읽으면 축구화를 사준다고 했는데 재미있어서 이틀 만에 읽었다고요? 아빠가 약속을 잘 지켰는지 궁금하군요. 혹시 아직도 지키지 않았다면 꼭 연락 주세요. 제가 후배 철학자들로 약속 지킴이 원정대를 파견할게요. 음… 공격수로는 선제공격의 대가 홉스와 불의를 참지 않는 슈클라로, 수비수로는 용맹한 마르크스와 정의로운 롤스로 라인업을 하면 어떨까 싶군요.

공격수(홉스와 슈클라), 수비수(마르크스와 롤스) 라인업

   두렵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비록 조금 약해도 과감히 슈팅을 때려보고, 힘들어도 한 발짝 더 뛰면서 노력하고, 그렇게 새로운 것을 찾아가며 보람을 느끼는 연호 어린이가 무척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축구하고 생각하면서 행복한 어린이로 성장하세요. 동굴 밖 세상에서 즐겁게 많은 것을 만나기 바랍니다!


 -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춘천의 연호 어린이에게 -

그리스어 찾아서 플라톤 서명도 함...

   연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못 믿겠다면서도 믿고 싶은 눈치였다고 합니다. 축구소년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특별히 고른 바이에른 뮌헨 막대사탕은 중요한 날에만 하나씩 꺼내 먹겠다며 꽁꽁 숨겨 두었다는데, 이제는 다 먹었을까요?

편지와 함께 소포로 보낸 까까들

   다음은 미국 녹스빌에 사는 유나 어린이의 글입니다. 유나는 마르크스를 골라서 영어로 소감을 남겨 주었는데, 마르크스가 독일 사람이라 저도 짧은 독일어를 섞어 답장을 썼어요. 참고로 미국인 아빠가, 내 딸이 왜 마르크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냐며 당황스러워했다고 합니다. 으하하 :D

   할로, 유나!

<동굴 밖으로 나온 필로와 소피>를 열심히 읽어 주어서,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저씨의 주장을 담은 ‘사탕 공장의 한스’를 눈여겨 봐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열심히 써 준 글에 유나 어린이의 똘똘함과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져서 아저씨 마음도 정말 흐뭇했어요. 이렇게 멋진 글에 답장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아저씨를 부르는 곳이 많아서 조금 바빴어요. 세상에는 아직도 고된 노동을 하는 아이들이 있고, 비참하게 일하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유나의 글을 읽으면서 아저씨도 계속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이들은 공부하고 놀아야 한다는 것,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즐겁게 공부하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거나 시도하지 못한 멋진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말이 특별히 좋았어요. 유나도 그런 일을 해내기 바랍니다. 이렇게 따뜻한 마음과 밝은 눈을 가진 어린이라면 분명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Ich bin sicher! (저는 확신합니다!)


   아동 노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도, 또 아동 노동은 아이들에게 정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도 진심으로 동의해요. 유나 말대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지요. 하지만 그런 돈에라도 기대서 살아야만 하는 가정도 있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아이들은 공부하고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들면 좋겠죠? 춥고 배고픈 어린이들도 한스가 포장하는 사탕처럼 달콤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우리 모두 조금씩 힘을 내서 세상을 조금씩 바꿔야겠지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텐데요. 모든 어린이들이 이 날만큼은 작은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네요. 아저씨도 그런 소망을 담아 산타 모자를 써 보았어요. 어때요, 저의 복슬거리는 수염과 잘 어울리지 않나요?


   멋진 유나 어린이.

앞으로도 열심히 책을 읽고, 건강하게 뛰어놀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어린이로 성장하세요. 동굴 밖 세상에서 즐겁게 많은 것을 만나기 바랍니다! Frohe Weinachten!


- 19세기 독일의 마르크스 아저씨가 미국 녹스빌의 유나 어린이에게 -


p.s. 아 참, 유나 어린이가 제 이름을 써 놓은 걸 보고 아빠가 놀랐다죠? 아빠한테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고 꼭 좀 전해 주세요. 유나네 가족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기 바랍니다! 아저씨의 나라 독일에도 언제 한 번 놀러 오세요!

인터넷에서 마르크스 서명 찾아서 여기에도 슥슥 :)
굿즈로 제작했던 파일을 야무지게 사용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공산주의자에게서 심지어 뭐가 왔다고 유나 아버님께서 기겁하시는 거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이벤트에 진심인 편입니다.
첫 책과 두 번째 책이 나왔을 때는 부끄러워 삐걱거리느라 북토크나 강연 외에는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째 책부터 감사의 마음을 전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서문을 직접 읽은 녹음 파일을 만들기도 하고, 손글씨를 엽서와 함께 보내드리기도 하고, 쇄를 거듭할수록 이런저런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아래는 마감이 하나 끝나 잉여력이 넘칠 때 만들었던 <아이라는 숲> 표지들. 책 속 챕터 제목이나 표지 문구를 갖고 장난친 건데요.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이 책을 쓴 사람과 여기서 이러고 놀고 있는 사람이 정말 동일인물이냐는 질문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깔깔깔(경박).

그런 마음이 닿았는지, <아이라는 숲>은 현재 9쇄까지 나왔다는 놀라운 소식!  

   아래 사진들은 본격적인 <아이라는 숲> 독자 이벤트로 진행한 #글씨내놔 이벤트.
독자님들이 책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을 골라주면 제가 손글씨로 써서 보내드렸던 이벤트인데요. 독일어가 쓰인 엽서 하나, 숲이 그려진 엽서 하나씩을 함께 보냈는데, 골라주신 문장과 어울리는 엽서를 고르며 저도 꽤 즐거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외국 우표가 붙은 편지봉투를 받는 느낌이 참 좋았다고 말씀해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저는 이렇게 제 방식으로 소심하고 즐겁게 독자님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도 많고 낯도 가리는 성격이라 처음엔 책을 출간해 놓고는 안테나를 꺼두는 편이었는데, 정성껏 쓴 글이 더 많은 분께 닿으면 좋겠다고 마음가짐을 바꾸니 조금 편안해지더라고요.


   사실 최근에는 제가 여기에다 연재한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을 읽고, 너무 예쁘고 와닿는 단어들이 많은 것 같아 외고에 진학해서 독일어를 공부해보고 싶다는 중학생 독자님의 연락을 받고 겁이 더럭 났습니다. (H 양 보고 있나요.) 반가움과 기쁨보다는 책임감과 두려움이 더 크더라고요. 나 같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면 안 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 그리고 인생이란 그렇게 쉽게 망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발 그래야 한다) 믿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계속 글을 쓰고 싶고, 깜깜한 우주로 저의 보이저 호를 연이어 띄워 보내고 싶으니까요. 그것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띄워 보내는 글자들에 응답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어떤 이벤트를 할지 궁리하며 즐겁게 지내겠습니다(그전에 책이나 다 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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