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Feb 06. 2024

1월의 책들

   그간 기록을 남기고 싶은 좋은 책들을 많이 만났는데도 제 책 원고 쓰느라 바빠서 가만히 흘려보냈네요. <읽고 씁니다> 매거진도 너무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주변의 책들에게 미안한 느낌. 그래서 임시방편으로라도 이렇게 한 편 올립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짧은 리뷰에 아주 약간만 살을 붙인 내용이에요. 큐레이팅은 아니고 그냥 제가 읽은 책 리스트일 뿐이지만 모든 책들이 각각의 이유로 좋았습니다. 제가 1월에 새로 읽었거나 다시 읽은 책들이에요.  


박해영, <나의 아저씨 대본집 1, 2>


내게 이 이야기를 요약하라면 ‘그저 단 한 명의 어른’, 그리고 ‘후계동 조기 축구회’라 하겠다. 너무 좋았고 많이 아팠다. 자연재해나 재벌가나 초능력자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냥 우리 주변에서 따뜻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단단하고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구나. 이십 대 시절 나에게 주어졌던 후계동 조기 축구회가 떠올라 그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음에 고마웠고,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좀 비틀거리더라도 맑게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아꼈던 인물은 정희, 그리고 가장 마음에 남았던 대사는 극 중 조연인 제철의 대사. “인생 그렇게 깔끔하게 사는 거 아녜요.”


정유정, <완전한 행복>


세상은 너만의 행복을 찾으라고 소리 높여 말하지만 나의 행복이란 얼마나 타인과 직결되는 문제인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이상의 말을 덧붙이기 어렵다. 실은 정유정 작가님 작품을 읽자고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기괴하고 잔혹한 이야기에 기겁하는 아주 작은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영화 <쉬리>를 보고 거의 한 달 정도를 밤에 불만 끄면 무서웠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대체 어디에 그럴 만한 장면이 있었냐고 묻는다. 그 마음 나도 이해한다.) 생각보다는 감당할만해서 마침 이웃 분께서 읽고 전해주신 <28>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음. 책을 읽으면서 “웃음소리로 몸을 간지를 수 있는 여자“를 만나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다.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제법.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어떤 종류의 앎은 ‘감당’과 동의어였다.” 이 소설을 읽고 신달자 시인의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을 읽지 마시길 :)


김하나X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았으면 좋았겠지, 싶은 친구를 떠올리며 읽었다. 나왔을 때 바로 읽었으면 좋았겠다. 너무 늦게 읽어서 약간 김이 샌 느낌. 내게 남은 것은 하나 작가님의 수건에 관한 정책,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성들에게 생기는 정체불명의 연대감.


가장 좋았던 부분은 김하나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 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백승주, <미끄러지는 말들>


한국어를 낯설게 보는 일이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의 혀가 가진 권력에 관한 다정하고도 위트 넘치는, 그렇지만 꽤나 얼얼하고 묵직한 이야기들. 전공이 전공이다 보니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이며 발명된 개념"이라고 말했듯, 언어 역시 '상상 속의 단일언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가깝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해만 했을 뿐 무지했구나 싶었다. 이 책을 통해 굉장히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가슴에 꽂아둘 수 있었다.


말이란 것이 어떤 순수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신체와 공간에 긴밀하게 얽혀있는, 당연히 탁한 것이라는 개념을 갖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 한국어를 매일 입에 담고 손끝으로 매만져 내보내는 자로서 한국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은 무척 신선하고도 귀중했다. 주변에 많이 추천하고 다녔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극호. 가장 중요하게 밑줄을 그은 부분은 "지옥에서 지옥이 아닌 부분을 찾아내 공간을 부여하는 일."


곽미성, <다른 삶>


세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언어 부분을 읽을 때 너무 좋아 꼬리가 저렸다. 이 분과 같이 언어 시리즈를 작업하고 있다니 나의 누추한 글들을 대체 어쩌지 싶어 난감한 상황. (연재 중인 '독일에서 전하는 단어들'은 올해 네 권의 언어 시리즈 중 하나로 나올 책 원고인데 그 시리즈의 프랑스어 편을 곽미성 작가님이 맡고 있다.) 표지에 든 단출한 문장이 말하듯이 다른 삶을 선택하기 위해 기꺼이 이방인이 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 조용히 순응하지 않고 다른 삶을 선택하는 태도에 보내는 따뜻한 격려랄까. 국적·언어·성별·외모처럼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나를 규정짓는 요소들, 그리고 살던 집과 직장 같이 내 선택의 범위에 있는 듯하나 새로운 선택을 하기가 만만치 않은 요소들을 두루 다루고 있다. 외국에서의 삶과 닿아있는 사람들이라면 더 공감하겠지만 '익숙한 내 삶 속에서의 다른 선택'이라는 조금 더 큰 주제로 본다면 누구에게든 닿을 이야기.


인상적이었던 문장은 이런 것들. 실은 이렇게 고른 문장들은 정말 중요하게 주제를 담는 문장들을 비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음에 유의하시길 :) 느슨하게 연결되거나, 나의 뭔가를 건드렸거나, 그냥 정말 내 취향이라 기록하는 문장인 경우가 많다.

"나는 그의 마음이 "쥬땜"과 닮았지, "사랑한다"와 닮은 것이 아님을 안다."  

"집의 공동구매야말로 결혼서약보다도 더 진지한 마음이 필요한 일임을, 그날 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세상에는 달지 않은 고구마를 푸념만 하는 사람과 왜 달지 않은지, 무엇이 다른지 궁금해하고, 찾아보고,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다. 호기심은 습관이다."


송정림, <하루 한 편, 세상에서 가장 짧은 명작 읽기 1>


집에서 청소나 요리할 때 귀에 꽂을 부담 없는 오디오북이 필요해서 골랐다. 원래 요약이나 발췌본 류의 책들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이 있는데 대만족. "고전을 읽지 않으면 인생 고전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에 웃었다. 신간의 홍수에 휩쓸려 오랜 보석들을 손에서 놓고 있었구나 싶어 그 깨달음만으로도 고마운 책이었다. 잊었던 고전들이 반갑게 다가왔고, 몇몇을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조르바 아저씨와 싱클레어.


김하율, <이 별이 마음에 들어>


70년대 노동서사를 SF로 만들어 낸 작가님의 상상력에 박수를. 효율성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외계인이라는 설정이, 소설 전반에 걸쳐 묵직함과 웃음을 번갈아 선사한다. 인간의 감정은 외계인 주인공인 니나(이 이름에 엮인 에피소드들이 아주 쫄깃하다) 눈에는 비효율적인 것으로 비친다. 소모적이니까. 하지만 초반의 이 판단은 이후 전개되는 니나의 여러 선택과 연결되며 의미가 깊어진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 놓인 묵직한 선택에 주목. 감정은 효율과 비효율의 문제가 아니며, 인간(!)은 간절하게 비효율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개인적으로는 감정에 관한 문제보다 중요하게 바라본 것이 '평화와 폭력, 작위와 부작위의 효율성' 문제였다. 초반에 ‘폭력은 비생산적인가, 그렇다면 평화와 부작위는 효율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중간에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뭉클하게.


의미 있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는데 정작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들은 소주의 맛과, 남녀의 밤에 관한 문장들. (쿨럭)

"쓴맛을 참으면 약간의 단맛이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됐다. 지구에서의 삶 같았다."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서 두 남녀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서로의 존재가 태산 같아서."


실은 온라인 북토크가 있다는 말에 서둘러 읽은 책이었다. (그러나 애써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어찌나 사람을 끌어당기는지 하루 만에 냅다 읽어버렸다.) 북토크에서 인상적이었던 작가님 얘기도 두 가지 기록해 둔다.

"고인이 된 가수들 노래를 들으면 유언 같기도 해요."
"자장면집 아들이 언제나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죠. 하지만 이건 사실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추천사]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