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림 글, 이명하 그림 『상자 세상』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는 '이진민의 그림책이 철학을 만날 때' 열세 번째 글입니다. 한정된 지면으로 인해 생각을 많이 쳐냈는데요. 누군가에게는 이 배송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사실, 택배 상자 안에 빼꼼히 보이는 하늘, 돌고 도는 책의 반전 구성 같은 것들이 더 다루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부분들입니다. 쿠팡 새벽배송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어떤 식으로든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속도와 효율'보다는 '생명과 생계'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의견을 모아가기를요.
오늘도 누군가의 집 앞에, 아파트 복도에, 택배 상자가 쌓인다. 그 많은 빈 상자는 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 많은 상자는 누가 다 배달하는 걸까. <상자 세상>은 상자 속 내용물만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에게 빈 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하게 소비하는 삶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편리’라는 단어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번개쇼핑에서 택배가 왔다. 안에 든 건 헬멧처럼 머리에 쓰면 자동으로 양치질을 해주는 칫솔. 편리한 물건 같기는 한데 왠지 좀 우스꽝스럽다. 저렇게까지 꼼짝 안 하고 싶을까? 배달 임무를 마친 상자는 창문 너머로 휙 내던져진다. 사람들이 집 밖으로 휙휙 버리는 상자가 산처럼 쌓여 아파트보다 높아지는 장면이 이 책의 압권이다. 과장된 모습이겠거니 싶지만 저게 과연 과장일까? 우리는 정말 무수한 물건을 주문하고 무수한 상자를 버린다. 홍수나 지진 같은 것뿐 아니라 우리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재앙일 수 있음을, 상자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산을 보며 느낀다. 재앙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일상이, 우리의 소비가 재앙이 될 수 있다.
배가 고파진 상자들은 닥치는 대로 도시를 먹어 치우고 상자 세상을 만드는데, 상자들이 담고 있던 물건과 먹어 치운 사물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옷 입은 채로 빨래하는 세탁기, 붙이면 30초 안에 화장해 주는 마스크 팩, 딸기맛 사과 주스, 왕이 되는 종합 세트…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고 어떤 것을 갖고 싶어 하는지, 피식 웃다가도 정색하게 된다. 상자는 무분별한 욕망에 의해 만들어지고 쉽게 버려지는 것들을 상징하는데, 우리도 그 일부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책 속에 “지구에 사는 우리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일 없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여러 이유로 목숨을 잃는 택배 기사들이 문장 너머로 어른거렸다.
쓰레기 분리수거 개념이 희박한 ‘플렉스’의 나라 미국에서 살다가 독일로 이사했을 때, 내가 두 나라 라이프 스타일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낀 곳은 마트였다. 독일 마트는 비닐봉지가 없고, 소꿉장난용인가 싶게 상품 용량이 작으며, 저녁 여덟 시면 대부분 문을 닫는다. 편의점은 천연기념물 크낙새 수준으로 희귀하다. 온 나라가 고객님을 사랑하고 24시간 편의를 봐주는 것에 익숙한 인간이 살기에 독일은 불편한 나라다. 하지만 불편한 삶이 곧 나쁜 삶일까? 달달한 미국물을 먹고 ‘갑(甲)’ 옷을 입은 조선의 소비자는 저녁이 고요해지는 곳에서 조금씩 편안과 평안의 차이를 깨달았다. 나의 편리는 누군가의 불편을 먹고 배달되는 것이었다. 나의 편안을 조금 희생함으로써 모두가 평안하자는 사회에서,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점점 편해졌다.
백 미터만 걸어가면 살 수 있는 물건을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겹겹의 포장재에 감싸, 그것도 새벽에 배송시키는 행위를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하는 행복’을 포기한 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게 행복일까? 쓰레기는 쌓여가고 사람은 쓰러져가는데, 과연 이게 ‘더 편리하고 더 좋은 세상’일까? 세상에는 오늘도 여전히 새 택배가 배달된다. 그 안에 묵직한 질문도 함께 담겨 배달되기를 바란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2304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