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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詩선] 9월의 시: 물음표 하나

물음을 물음

by 이진민

청소년들에게 물 한 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학사에서 내놓는 <고교 독서평설>에 시 읽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여기 올리는 글들은 최종본이 아닌 초안입니다. 지난 원고를 하나씩 올려놓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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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을 물음


[9월의 시] 물음표 하나


물음표 하나

-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문학과지성사, 1981)에서


누군가 물음표에서 물음을

뽑아 버리고 있다.

닭털처럼 날리던 물음

바람에 몸을 맡긴 물음

발가벗기던 물음

온몸에 물감을 칠하던 물음

얼굴을 가린 물음

통곡하던 물음.


물음의 눈물. 눈물의 홍수. 물음의 무릎. 무릎을 당겨, 물음. 돌아누워, 물음. 좋아, 물음. 개같이 짖어 봐, 물음. 물음, 입 벌려. 물음의 침. 침의 홍수. 물음, 무릎을 조심하라니까. 물음을 물어뜯는 물음. 잠자지 마, 물음. 노래 해, 물음. 바람처럼 흩날려, 물음. 쉼표, 이리 들어와. 물음을 막아 서. 나가지 못하게 하란 말야, 쉼표. 물음, 물음, 제자리. 노래하는 물음. 마침표를 버린 물음. 물음만 남아서 외로운 물음. 꼬리로 만들어진 물음. 비 맞고 꼬리를 세우던 물음. 흩날리며 입술을 깨물던 그 불쌍한 물음.


꼬리를 잃은 마침표 하나

숨죽여 울고 있다.

이제 누군가 다가가

표 하나에

쓰러진 물음을 쑤셔박으려 하고 있다.


묻다


저는 사전을 좋아합니다. 사전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대체로 앱이나 검색 엔진 형태의 인터넷사전을 떠올리겠죠? 두꺼운 사전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단어를 찾아본 경험도 아마 드물지 않을까 싶군요. 저는 국어사전과 영어사전, 옥편(한자를 찾아보는 사전이에요), 독한사전(사전이 독한 게 아니라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사전입니다) 등 다양한 사전을 찾아보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대다수의 학생이 늘 가방에 책 형태의 영어사전을 챙겼어요. 벽돌 하나를 장착하고 학교와 학원을 오갔다고 할까요. 영어사전은 당시에 중학교 입학 선물로도 인기 있는 품목이었답니다. 무겁긴 했지만 얇은 종이를 넘길 때 나는 바스락 소리도 좋았고, 단어가 알파벳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찾는 단어 근처의 이웃 단어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이건 비밀인데, 두께감이 있고 그리 딱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책상에 엎드려 잘 때 베개로도 즐겨 사용했지요(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번들번들 광채를 얻는 영어사전…).


추억 이야기가 길었지만 사전 이야기를 꺼낸 것은 ‘묻다’라는 동사 때문입니다. 뜻을 명확히 알기 위해 사전을 열어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단어들이 있어요. 제게는 ‘묻다’가 그랬습니다. 뜻풀이를 차례로 읽으면서 참 의미가 다양하고 깊은 단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묻다’는 우선 ‘무엇을 밝히거나 알아내기 위해 상대의 대답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것’(유경이는 3번 문제의 풀이를 선생님께 묻는다)을 말합니다. 가끔은 ‘책임을 따지는 것’의 의미로도 쓰이죠(아빠는 유경이가 돌아오면 성적이 왜 이 모양인지 따져 묻기로 했다). 어떤 것이 들러붙거나 흔적이 남는 경우에 쓰기도 하고(그 아이와의 대화는 마치 옷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유경이 마음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어떤 것을 흙이나 다른 물건 속에 넣어 보이지 않게 덮는 일, 혹은 숨겨서 감추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도 씁니다(유경이는 이 추억을 아무도 모르게 묻어두고 혼자만 꺼내 보고 싶었다). 명사형으로 ‘물음’이라고 쓰면 ‘입을 벌려 윗니와 아랫니 혹은 양 입술 사이에 끼우고 세게 누르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요(마음에 든 나뭇가지를 물고 놓지 않는 강아지처럼 유경이는 그 아이의 옷자락이라도 꼭 물고 그 자리에 오래 서있고 싶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이 동사의 의미를 모두 담아 짧은 소설이라도 한 편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물음’의 의미가 이렇게 다양하구나 싶지요? 각각이 꽤 의미심장하게 연결되는 느낌도 들고요. 이제 <물음표 하나>라는 시를 함께 읽으면서 ‘묻다’라는 단어 속 넓은 이야기 샘에 잠시 마음을 담가 봅시다.


침묵 권하는 사회


시 속 물음은 참 가련하고 불쌍해 보입니다. 누군가 물음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죠? 물음이 이리저리 안쓰럽게 뒹구는 모양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부분을 보면서, 제 마음도 같이 뒹구는 느낌을 받았어요. 물음을 이렇게 통곡하게 만드는 건 과연 누구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어떤 질문을 마음에 품곤 합니다. 내용과 결이 어떻든 내게 의미가 있는 질문을요. 그런데 내게는 중요한 그 물음이 사회에서도 널리 존중받기란 때론 어렵습니다. “의문을 품지 마, 더 이상 묻지 마.” 여러분도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들었거나 혹은 이와 같은 무언의 압력을 받아본 적이 있나요? 사실 저에게는 꽤 익숙한 말들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지시를 따를 것을 기대하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질문을 환영하지 않는 교실에서 공부했으니까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이 시를 같이 읽었던 몇몇 지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희 아이가 외국에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딸아이가 너무 질문을 많이 한다고 나무랐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가 점차 조용해지는 것을 ‘적응한다'고 하더라고요.” “시 속 '물음'이 겪는 상황이,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 질문하지 말라는 선생님들과 학교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던, 그리고 아직도 고생하고 있는 제 두 아들처럼 느껴졌어요.” 특정 국가와 비교되는 것을 피하려고 일부러 나라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한국 사회에서 부디 바뀌기를 바라는 부분이 바로 ‘물음’을 향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마음껏 궁금해하면 좋겠어요. 납득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충분히 묻고 답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편안하게, 또 생각을 유연하게 만들었으면 좋겠고요.


질문을 누르려고 하는 것은 비단 교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저는 우리 사회에서 안타까운 참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을 떠올렸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해 이유를 묻지만, 그 물음을 쑤셔 박으려는 자들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 말이죠. 조문(弔問)은 슬퍼할 조에 물을 문을 씁니다. 묻지(ask) 않으면 묻을(bury)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단히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조문이라는 아득한 단어에 ‘물을 문’을 넣어 둔 이유예요.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된 조문을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이 물음이 해소될 때까지 집요하게 물어보며(ask) 물고(hold) 늘어지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조롱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요. 물음표는 이 시에서처럼 이리저리 나뒹굴며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꼬리를 잃고 건조한 표 하나에 숫자의 형태로 쑤셔 박혔을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물음표에서 꼬리를 떼내어 마침표로 위장했다가도 어쩔 수 없이 가슴속에서 다시 자라나는 꼬리를 목격했을 거예요.


소설가 현진건의 단편 중에 <술 권하는 사회>라는 작품이 있어요. 이 소설은 주인공 아내의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저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이 몹쓸 사회가, 왜 침묵을 권하는고!”


소크라테스의 물음표


‘물음’이라는 단어를 듣고 “저 부르신 분?”하며 명랑하게 뛰어올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야의 시조새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바로 소크라테스예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물음표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의 문답법을 ‘산파술’이라고 하는데,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산파처럼 상대방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하는 거예요. 정답을 알려 주고 따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죠.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도, 이에 관해 다각도로 질문을 받다 보면 문득 그 개념이 낯설어지고 그 안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순을 깨닫는 순간을 ‘아포리아(aporia)’라고 해요. 그렇게 우리는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지요.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모순을 깨닫는 일이 당황스럽기도 하거니와, 질문은 곧 의심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테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위에 대한 불쾌한 도전으로 여긴 거지요.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당연한 믿음과 익숙한 생각에 새로운 각도로 질문을 던지고 또 던져서 결국 균열을 낸 뒤, 그 틈 사이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하지만 그 균열을 두려워하고, 거기서 자라나는 싹이 결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 위험성과 잠재력을 가진 것이라 여긴 사람도 많았어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결국 재판을 받고 독배를 마시게 됩니다. 시에서처럼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물음을 쓰러뜨리고 어딘가에 쑤셔 박으려고 했던 거죠.


질문은 위험하고 부정적인 것일까요?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의 말처럼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에요. “안물안궁”이라는 이 시대의 사자성어(?)가 있듯이, 아무런 관심이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라면 우리는 애초에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질문은 또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관한 궁금증이 이백 가지쯤 생기잖아요? 질문의 학문인 철학(philosophy) 역시 지혜(sophia)를 사랑한다(philos, philia)는 뜻이거든요. 알고 싶다는 바람, 이해하고 싶은 마음, 사랑의 또 다른 표현. 그렇기에 저는 여러분이 물음표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물음표를 이 사회가 소중하게 안아줬으면 좋겠고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쑤셔 박으려 했지만 굴러 굴러 오늘날 대한민국에까지 이른 소크라테스의 물음표들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물음을 없애려는 힘에 맞서는 물음의 힘을 목격합니다. 좋은 질문의 힘이 인류를 이끌어왔고, 여러분 가슴에 품은 중요한 물음표는 여러분의 인생을 어딘가로 이끌 거예요.


물음표와 느낌표와 마침표


이 시 덕분에 물음표가 생긴 모양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물음표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평소에 무심코 넘기는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니, 시는 꼭 소크라테스의 질문 같기도 합니다. 사실 시 자체가 우리에게는 다양한 물음표를 남기는 문학 형식이기도 하지요. 설명문을 읽을 때보다는 수필을 읽을 때 조금 더 모호한 구석이 생기고, 수필보다는 소설이, 소설보다는 시가 좀 더 알쏭달쏭하잖아요. 그러니 시를 즐겨 읽으면 여러분이 자연스레 다양한 질문을 품을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토실토실 살찌울 거라고 믿습니다.


물음표는 점 위에 갈고리 같은 것이 놓인 모습이에요. 어딘가에 내 관심 또는 생각을 걸어두는 느낌도 있고, 직선과 곡선이 연결된 모양이 꼭 생각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해요. 느낌표는 직선으로 쭉 뻗은 모양이라 내게서 일직선으로 발사되는 느낌이라면, 물음표는 둥글게 돌아가요. 사실 질문이란 이 길 저 길 돌다가 생기는 거니까요. 또 물음표는 씨앗에서 작은 새싹이 동그란 머리를 치켜들고 쑤욱 솟아나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돋아나는 새싹을 뽑아버리고 성급히 점 하나로 만들면 안 되겠지요. 사실 예전에 제가 경험했던 교실은 물음표를 빨리 느낌표나 마침표로 바꾸려는 힘이 작용하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물음표가 느낌표나 마침표, 혹은 이 시에서처럼 쉼표에 밀려 속박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꼬리가 닭털처럼 뽑힌 채 쓰러져 울지 않았으면, 즉 충분한 시간을 거쳐 꼬리가 자연스럽게 쭉 뻗어 느낌표가 되거나 아름답게 사라져 마침표가 되면 좋겠어요. 물론 어떤 물음표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더 많은 물음표들을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면 좋겠습니다.


물음표를 가만히 보면 사람의 귀 모양을 닮았어요. 질문을 했으면 들어야지요. 내 질문만 소리 높여 외치고 상대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거예요. 그건 사실 질문이 아니라 과시이고 독단이겠죠. 질문만큼 중요한 것은 ‘경청’입니다. 묻고 답하고 듣고 다시 묻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하는 것이 바로 언어를 통한 소통 능력입니다. 사람이 어울려 살다 보면 의견이 갈라지고 반드시 의문이 생기는데, 충분한 문답을 통해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공동체적 삶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질문을 가지는 것, 그 의문을 함께 풀어가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동물도, AI도, 좋은 질문을 품고서 서로 소통하고 경청하며 풀어가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여러분이 물음표가 생긴 모양을 한번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갈고리, 둥근 길, 새싹, 그리고 귀의 모습을 차례로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닌 물음


우리가 지닌 물음표들을 돌아봅시다.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요즘 어떤 질문이 가슴에 가장 묵직하게 들어 있나요? 여러분은 질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묻기를 좋아하나요, 아니면 침묵을 더 편안해 하나요? 혹시 의문이 생겨도 마음에만 품어두고 밖으로 꺼내는 것을 어려워하지는 않나요?


가슴에 품은 질문을 당장 꺼내서 세상에 던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음표가 생겼을 때 바로 상대를 찾아 대화를 시작하거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이리저리 탐색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떠오른 질문을 오래 마음에 품고 발효식품처럼 숙성시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저는 단지 여러분이 질문을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주변의 어른들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요. 그리고 내 질문만큼이나 타인의 질문을 귀하게 여기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물음을 가장한 물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음표를 달고는 있지만 전혀 물음이 아닌 것들이 있지요. 다그칠 때 사용하는 물음(대답해 봐, 부모도 용돈도 필요 없단 말이지?), 자기가 맞다는 사실을 상대가 확인해 주기를 바라는 물음(누가 이런 말을 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냐?), 비꼬는 마음이나 경멸을 담은 물음(야, 너 지금 그걸 옷이라고 입은 거야? 집에 돈 없어?),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한 물음(얘들아, 나 요즘 살 좀 찐 것 같지 않니? 나 머리 새로 했는데 어때?) 등. 여러분이 하루 동안 물음표를 달고 내뱉은 말들을 떠올려 보세요. 어떤 것이 예쁜 새싹 같은 물음이고 어떤 것이 쇠꼬챙이 같은 물음인지는 아마 여러분이 더 잘 알 겁니다.


우리는 대체로 질문을 해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기보다 혼자서 질문거리를 지워가는 것을 선호해요. 진지함보다는 즐거움을,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좋아하고요. 하지만 천천히 꼼꼼하게 질문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답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계속 질문하지 않으면 우리는 가야 할 방향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니까요.


물음표가 생긴 모양이 갈고리 같다고 했지요. 물음표는 그렇게 나와 너, 세상과 세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어 줄 거예요. 많은 중요한 질문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솟아날 시기인 여러분이 뭔가에 쫓기고 짓눌려 그 영롱한 방울을 함부로 터뜨려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물음표를 곧게 세우고, 느낌표를 짓누르지 않고, 적절히 쉼표를 배치하고, 또 마침표는 온전히 나의 결정으로 찍으며 여러분의 인생을 써 나가기 바라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여러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그 모든 물음에 따뜻한 응원을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질문하기를 좋아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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