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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꽃 May 23. 2019

예쁨주의,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달팽이

캘리그래피 작가 달팽이 인터뷰


사는 곳이며 작업 공간인 달팽이의 집.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훔쳐가고 싶은 서각, 버닝 작품과 그림들이 벽이며 바닥이며 탁자 위 보이는 곳곳마다 수북하다. 책상 위엔 먹글씨가 가득한 화선지들이 분량을 가늠할 수 없이 켜켜이 쌓여있다. 감탄으로 눈길이 닿는 곳을 따라 달팽이는 큰 눈을 반짝이며 달뜬 목소리로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쏟아냈다. 스스로가 지나치지 못해 내 손을 이끌어 머문 작품도 있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창문 유리에 붙여놓은 해바라기 꽃 그림이며, 화선지 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서각 작품, 방문에 붙여두고 읽고 또 읽는다는 중용 23장의 글귀. 들어보라며 가만가만 읽어내리는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서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중용 23장 중   


중용의 글귀에 함께 머무는 동안, 캘리를 만나 작가로 활동하기까지 그의 남다른 이력이 그가 써놓은 글 속으로 묘하게 겹쳐 보였다. 대학은 수학과를 나왔고 동아리에서는 연극을 했다. 졸업 후엔 어쩌다 보니 출판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이 우연히 학원 몇 달을 다니고 들어간 회사였는데 편집작업을 하는데 가슴이 막 들끓었다. 재능은 없었는데 재미가 있었다. 재미가 들려 열심히 했는데 디자인 구성은 엉성했다. 시각적 퀄리티를 높이고 싶어 궁여지책으로 시간만 나면 닥치는 대로 전시를 보러 다녔다. 2011년 1월. 명사들의 신년 메시지를 담은 캘리그래피 전시회에 갔는데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충격을 받았다.   

  

백인의 메시지를 담은 백 개의 글씨가 모두 달랐어.
글의 내용과 글씨가 저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충격적으로 아름다웠어.


손으로 쓴 글씨가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악필 때문에 컴퓨터로 일하는 것만 좋아했고 손으로 작업을 한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그에게 캘리는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캘리라는 걸 배우고 싶어졌다. 배운다면 꼭 저 작가, 강병인 선생님께 배우고 싶었다. 너무 악필이라 당장은 배울 수 없을 것 같아서 제자가 될 길을 모색했다. <바른 글쓰기 교본>을 사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배워가며 석 달 동안 열심히 글씨를 썼다. 매주 <민들레> 읽기 모임을 할 때 두 번을 꼼꼼하게 읽었고, 마지막은 반드시 필사를 해 가며 읽었다.  


2012년 가을. 드디어 강병인 선생님께 캘리를 배울 기회를 얻었다. 첫 번째는 떨어졌고 두 번째 신청에서야 가능했다. 간절함은 배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설렜다. 그저 배우기만 하는 일이었는데, 마치 인생이 새로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캘리를 배우는 행복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숨어있던 자신 안의 감각들이 붓끝을 타고 살아 나와 꿈틀대며 글씨가 되었다.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배움이 즐거웠다. 재밌고 좋아하는 일을 사람들과 얘기하며 나누는 일도 신났다.


2013년 가을, 첫 전시를 했다. 길이 되는 스승을 만난 일도, 그와 함께 무엇을 도모하는 일도, 심지어 같은 무대에서 전시를 하는 일도 생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짜릿한 전율, 표현할 길 없는 울컥함이 몸에 깊게 새겨졌다. 그렇게 미쳐갔다. 꼬박 4년, 매일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일반과정을 시작으로 작가과정, 전문가과정을 거치는 동안 붓끝의 감각을 익히며 필력을 키우기 위해 서예를 배우고, 캘리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어 서각, 정각, 우드 버닝, 먹그림을 배워 익혔다. 어느 순간 악필에서 벗어났고 어느 틈에 캘리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작품 제작, 전시회, 강의, 판매, 문화예술인으로 등록되기까지 어느 것 하나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끓는 피가 이끄는 대로 신이 나서 미친 듯이 배우고 익혔을 뿐이었다.  



한 사람이 활을 쏘는데 잘 못 쐈어. 주변에서 쟤는 재능이 없다 보다 하는데 스승이 나타나 저 친구는 활 쏘는데 재능이 있다고 하는 거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것. 그것이 저 친구의 재능이다.’라고 하더라고.


배움이 빠르거나 탁월한 재능을 지닌 건 아니었다. 오히려 왼손잡이가 오른손을 쓰면서 평생 악필로 살았다. 그저 뜨거운 피와 버텨내는 엉덩이 힘으로 느리게 느리게 자기 앞에 열린 길을 따라갔다. 무슨 일에서나 재능있고 반짝이던 사람들이 다 그만두고 물러섰는데 끝까지 남았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힘,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달팽이만의 재능이다. 열정이 사그라들고 노력이 절대적일 시기. 캘리에도 그런 시간이 왔다. 작업은 느려지고 집중력은 떨어졌으며 눈이 높아진만큼 만족도도 낮아졌다. 망설임과 늘어짐이 머무는 사이, 마무리하지 못한 작품들이 쌓여갔다.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안주하려는 자신과 붙들려는 자신 사이에 지옥을 맛보았다. 자신의 의지에만 기대어 작품을 하는 시간, 넘어서고 싶은 마디마다 고통스러웠다. 고통이 있어서 쾌감도 찾아왔다. 삶의 역설이다.     


마치 일체감과 같은거야. 혹은 오르가즘 같은거야 말을 하자면. 붓이 물기를 머금으면 정말 아름답거든. ‘붓 끝을 송연하게 하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있어. 붓끝을 정갈하게 뾰족하게 만드는 거야. 그때의 나의 자세를 통해 글을 쓰고 표현하는 거거든. 아름답게 뾰족해 있는, 잘 정리된 붓을 들어서 그 끝으로 화선지에 글을 쓰는 어느 순간, 정말로 쾌감이 확 올라와. 몰입이 끝나는 순간 알지. 내가 후욱 들어갔었다는 걸. 서각할 때도 그래. 이게 내 서각도구야. 무시무시하지? 이걸 이렇게 들어. 얘를 탁 박아서 글씨대로 투두둑, 결대로 투두둑해서 파내는 거야. 그 순간이야. 버닝할 때, 편집할 때도 그랬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만났다는 점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고통을 견뎌낸 몰입의 순간, 찾아오는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이 좋아 고통스러워도 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열정을 쏟을 일을 만난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달팽이에게 기회는 힘들이지 않아도 늘 우연처럼 찾아왔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들이 지금의 커리어를 만들어왔듯, 지금의 노력도 언젠가 새로운 문을 열 열쇠가 될 것이라는 달팽이. 그의 우연은 진짜 우연일까.


진짜 좋아서 살짝 미친 사람들의 것이 흔히 그러하듯 달팽이의 작품은 온통 그 자신이다. 고된 하루 끝에 그의 작품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는 말이나 자신의 삶과 닿아 감동을 느꼈다는 말을 들으며 감동을 돌려받는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진정성에 매료된 매니아층이나 지지자들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스스로조차 자신에게서 나온 작품이 위로가 되어 돌아오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며 수줍게 웃는 달팽이. 그의 캘리씨창작소는 캘리의 씨앗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나누는 공간이다. 가슴에 씨앗 하나 품은 사람들이 함께 배우고 작업하며 나누는 곳. 달팽이는 앞으로 드라마 타이틀이며, 영화 타이틀을 쓰는 일에서도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싶다.


작가로 활동하며 쌓아온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캘리는 아직 그의 밥벌이가 되어주진 않는다. 그것은 돈의 가치로만 보자면 오랜 배움과 노력의 시간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지 못하는 그저 무용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아직도 30년 가까이 그의 밥줄이 되어준 편집일로 먹고 산다. 강남 삼성동의 아파트에서 남양주 수동 시골로 흘러 흘러 온 이사의 이력은 먹고 사는 일에서 아름다움을 쫓는 일로 흘러 흘러 온 삶의 이력과 같다. 아름다움이 삶 안으로 깊게 밀고 들어온 어느 날부터 편집일은 그저 딱 먹고 살만큼만 하고 산다. 나머지 시간은 두 아들을 보살피는 일과 생계과 상관없는 이 캘리 작업에 온통 몰두한다. 없으면 없는대로 쪼들려가며 그냥 살고 있다. 이 아름답고도 무용한 일 끝에 또 어떤 새로운 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는 달팽이의 얼굴은 ‘진짜 좋아서, 푹 빠져서, 살짝 미쳐서 제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몰아’의 그 예쁨‘(<출판하는 마음>, 은유, 김민정씨의 말 중)이 폴폴 풍긴다.     




1. 연습 종이와 펜이 가까이 두어라. 멋진 글씨로 쓴다는 것은 습관을 바꾸는 것이기에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2. 아트북과 캘리그라피펜을 가까이 두어라. 언제 어디서든 들려오는 보이는 좋은 글이 스쳐 지나지 않도록 남겨야 한다.

3. 글이 깊어지고 표현이 멋져지는 과정을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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