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만큼 일해도 살만한 세상
오전 7시 50분쯤 일어나서 어제 체한 작은 아들 죽을 끓이려는데 부엌이 난장판이었다. 미역국을 끓였던 대형냄비, 불고기를 해먹은 소형냄비, 떡갈비를 구웠던 프라이팬, 무엇인가를 씻거나 잠시 담았을 각종 볼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컵들, 콘플레이크에 우유를 타 먹은 국대접을 비롯하여 어제 종일 먹고 쌓인 밥그릇과 수저, 국자, 칼, 집게, 가위들. 거기에 남편이 퇴근하며 학교에서 받아온 포장 도시락까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식탁으로부터 시작해 연결된 아일랜드 탁자와 개수대 주변 선반들까지 바나나 껍질, 오렌지 껍질, 참외 껍질에 각종 음식물 쓰레기와 설거지 더미들이 쌓여 있었다.
전날 오전엔 PT, 점심 전까지 공부, 오후엔 깜짝 방문한 오랜 동료 교사와 강둑길을 걷고, 저녁엔 슬친들과 밤 산책을 다녀오느라 종일 집안일에 신경 쓰지 못했다. 설거지 담당인 큰아들은 마침 어제 나가, 오늘 아침에야 들어 왔다. 치우는 사람은 없고 먹는 사람만 있으니 부엌이 엉망인 건 당연했다.
한쪽에서 죽을 끓이면서 한쪽에서는 씻어야 할 식기들을 모으고 쓰레기는 버리면서 음식물 쓰레기는 한쪽에 소복소복 쌓았다. 식기들을 물에 담가 수세미로 닦고 헹구기를 무려 다섯 판이나 돌리고서야 설거지는 대략 마무리되었다. 2시간이 훌쩍 넘었다.
넉넉하게 시간을 내어 설거지하고도 종종거리며 짜증이 나질 않았다. 어마어마한 쓰레기더미를 치우고 그릇을 닦았는데 진이 빠지질 않았다. 오히려 개운하고 평온하다. 낯선 몸이 낯선 감정과 함께 왔다.
전투적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이들 밥을 챙기고 과일주스를 갈아놓고 6시면 차를 운전해 40분 거리의 학교에 도착하면 0교시 보충수업을 시작으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수업과 업무를 해치웠다. 정규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가 되면 교실 청소를 하고 곧바로 보충수업을 했다. 그 시절엔 고등학교 평균 주당 수업 시간인 16시간을 훨씬 넘겨, 30시간 수업을 했다. 거기에다 주 2회, 10시까지 자율학습 감독을 하는 날이면 11시나 되어야 탈진한 몸으로 집에 도착했다. 안방에는 “엄마 집에 빨리 와서 같이 놀아요.”라고 적어둔 카드를 머리맡에 두고, 6살 큰아이와 밤 기저귀를 아직 못 뗀 4살 작은아이가 말캉말캉 잠들어 있었다. 부엌엔 뚜껑이 열려 있는 반찬통과 이리저리 춤추듯 널브러진 수저들, 밥풀과 반찬이 말라붙은 각종 그릇과 음식 찌꺼기들이 즐비한 식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 뒤 드디어 아이들을 껴안을 때면 12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매일 젖은 솜처럼 축 늘어져 땅바닥으로 꺼질듯한 몸을 질질 끌고 살았다. 학교 복도를 걷다, 혹은 수업을 하다 눈앞이 훅 꺼지고 신경이 툭툭 끊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핑그르르 돌며 쓰러지곤 했다. 주말이면 아이들이 양쪽에서 치대고 끌어도 정신없이 잠만 자는 날도 종종 있었다. 에너지를 퍼다 쓰고 남은 41kg의 몸으로 헐거워진 바지에 핀을 꽂고 허위허위 걸어 다녔다. 내 몸을 넘어선 과도한 노동으로 지탱하는 삶이었다. 어떻게 살았을까. 지금 돌아보면 ‘뭘 그렇게까지?’라고 되묻고 싶다.
각자의 몸에는 감당할 수 있는 노동의 양이 있을 것 같다. 지치지 않고 개운하고 평온하게 일할 수 있는 적당한 양. 모두가 딱 그만큼씩만 하고 살아도 생존에 전혀 지장이 없는 그런 세상을 살면 좋겠다. 현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상상이라고 속삭이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괜히 아득하고 미안하고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