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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Feb 22. 2022

제갈량의 북벌 (2) - 출사표

제갈량의 1차 북벌

위나라 대촉 사령관, 조진


출사표를 내고 위나라로 향하다.



  촉나라 내부의 결속을 다지며 숨죽이던 제갈량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제갈량이 남만에 몰두하는 사이 위나라와 오나라는 계속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제갈량을 제외하고 촉나라에 인재가 없다 판단한 조비는 제갈량이 남만으로 향하자 촉나라 방어 병략 대부분을 오나라를 막는 병력으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곧이어 조조의 차남이자 위나라 2대 황제 조비가 사망한 것이다. 조비의 사망 자체도 촉나라에 있어 상당한 호재였는데, 그 이상의 파급 효과까지 있었다. 조비가 총애했던 사마의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더불어 위나라 상용 지방의 수비를 맡고 있던 맹달 역시 입지가 불안해졌다. 맹달은 본래 관우의 휘하 장수였는데,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고 위나라에 투항한 항장이었다. 다행히도 위나라 황제 조비가 맹달을 좋게 보아 위나라에서 잘 정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촉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맹달을 싫어했다.

  조비 사망으로 맹달은 입지가 불안해지자 촉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대부분의 촉나라 인사들은 맹달의 투항에 반대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맹달이 촉나라에 합류하고 상용을 차지한다면 상당한 이점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그의 투항을 반겼다.


  상용의 위치를 생각하면 맹달의 투항은 촉나라에게 엄청난 힘이 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제갈량의 최종 목표는 위나라의 수도 낙양성이다. 그리고 낙양에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성이 바로 장안성이다. 오늘날 시안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뚫기 어려운 성 중에 하나였다. 마치 중국의 이스탄불과도 같은 중국사 최고의 요새다. 과거 서량의 마초조차 조조군 공격 시 장안성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할 것이라 판단해 북방으로 우회하여 낙양으로 향했다. 반대로 서촉에서 북상해야 하는 촉은 군대는 낙양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을 돌파해야 했다.

  하지만 상용의 맹달이 촉나라에 귀순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상용이 촉나라 손에 있다면 장안 루트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상용에서  낙양으로 가는 다른 루트인 완으로 향할 수도 있고, 한중의 병력과 양동 작전으로 장안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형주 최대의 도시인 양양에서 상용을 공략하는 병사에 포위될 가능성이 있지만 양양을 견제할 수 있는 오나라가 존재한다. 여러모로 촉나라에 상당한 이득이 되는 행동이었다.


  맹달의 투서를 본 제갈량은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며 위나라에 선전 포고한다. 유비의 대업을 물려받은 제갈량의 출사표는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문장가로도 이름을 날렸던 제갈량의 뛰어한 문체도 확인할 수 있다.




“선제(유비)께서는 창업하신 후로 그 뜻의 반도 이루지 못하신 채 붕어하시고, 이제 천하는 셋으로 정립되어 익주가 매우 피폐하니, 나라의 존망이 위급한 때이옵니다. 그러나 폐하(유선)를 모시는 대소 신료들이 나태하지 않고 충성스러운 무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음은 선제의 특별한 대우에 잊지 않았음이고 황은을 잊지 않고 폐하께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옵니다…(중략)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로 남양의 딱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이나 붙이고자 하였고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오나 선제께서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어 찾아오시니 신은 이에 보답하고자 선황제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이후 한 황실의 국운이 기울어 싸움을 패하는 어려움 가운데 소임을 맡아 동분서주하여 위난 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일을 행해온 지 어언 스무 해 하고도 한 해가 지났습니다… (중략)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한 것을 아시고 붕어하실 때 신에게 탁고의 대사를 맡기셨습니다. 신은 선제의 유지를 이어받아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나아가 중원을 마땅히 평정시켜야 할 것이옵니다… (중략)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리며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제갈량은 유비가 자신을 등용하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온 사례를 들며 선제의 은혜에 감사를 표한다. 이제 대업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한다. 중국 역사상 단연 최고의 지략가이자 천재의 대명사. 약소국 재상임에도 불구하고 대업을 위해 북벌을 실시한 로맨티시스트. 제갈량의 북벌이 서기 227년 시작되었다.



중국 박물관에 위치한 출사표 비석



227년, 맹달의 위나라 배반



  관우의 죽음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촉나라 출신의 배신 장수 맹달. 조비의 죽음으로 입지가 불안해지자 이를 놓칠 제갈량이 아니었다. 제갈량의 서신을 받은 맹달은 촉나라에 투항 의사를 전달한다. 제갈량의 참모 중 한 명이었던 비시는 그의 배신 이력을 내세우며 맹달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한다. 맹달은 실제로 제법 능력은 있었지만 잦은 배신 이력이 있어 주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유비군에 합류하게 된 계기 역시 서촉의 지도자 유장이 무능하다고 판단해 그를 배신하고 법정과 함께 유비군에 항복했다. 이후 형주 공방전에서 위나라 부대가 오자 관우를 버리고 위에 합류한 것이었다. 제갈량은 오히려 그의 화려한 배신 이력 덕분에 그의 투항이 믿을만하다며 작전을 실행시켰다.


  하지만 배신을 약속한 맹달이 거듭 애매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를 들며 거병을 차일피일 미룬 것이다. 보다 못한 제갈량은 장수 관모를 위나라에 위장 귀순시켜 맹달과 사이가 좋지 않던 상용의 유력자 신의와 내통하여 맹달의 반란 사실을 위나라 조정에 알렸다. 소식을 듣게 된 위나라 표기장군 사마의는 맹달을 달래는 서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상용을 토벌한 군대를 모집한다. 맹달이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마의의 토벌 군대가 완성된다.


  곧바로 사마의는 맹달에게 입조를 명령한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맹달은 뒤늦게 거병한다. 그리고 곧바로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낸다.


상용은 지세가 험준하고 낙양과 거리가 멀리 있습니다. 게다가 사마의가 군대를 일으켜 표문을 올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족히 한 달을 걸릴 것입니다. 게다가 위나라 정사를 돌봐야 하는 사마의가 직접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의의 군대는 낙양에서 상용까지 단 8일 만에 도달한다. 깜짝 놀란 맹달은 재차 제갈량에서 서신을 보낸다.


거사한 지 단 8일 만에 사마의가 도달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촉나라와 오나라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원군을 파견하지만 사마의는 단 16일 만에 상용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배신자 맹달은 곧바로 사로잡혀 참수당한다.


  맹달은 우유부단한 태도로 죽음을 재촉했다. 배신하기로 결정했으면 신속한 판단이 우선시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채 사마의의 군대에 토벌당한다. 제갈량의 북벌에 대한 첫 단추는 실패로 시작되었다. 제갈량은 맹달의 실패로 진령산맥을 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의 1차 북벌 - 어디로 갈 것인가?



  옹주.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산시성 부근으로 고대 주나라부터 중국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전국시대와 한나라를 거치며 낙양(오늘날 뤄양)이 중심 도시로 떠올랐으나, 진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오늘날 시안)은 당시 중국 최대의 도시였다. 촉나라는 바로 이 옹주 지역을 넘어야 했다.

  문제는 위나라의 옹주와 촉나라의 익주 사이에는 진령산맥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이 존재했다. 촉나라는 이 진령산맥 덕분에 영토를 수비하기 용이했지만, 반대로 공격에 나서기 위해선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했다. 별다른 인프라가 없던 3세기 초였기에, 촉나라는 기존에 있는 잔도를 활용하거나 새로 지어가며 공격하는 방법뿐이었다.


  진령산맥을 넘어 장안으로 가는 방법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아래의 지도는 위나라의 옹주와 촉나라의 익주 경계에 위치한 도시들과 잔도의 위치다.  


제갈량의 북벌 지도




    자오곡 루트 : 한중에서 곧바로 장안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다만, 거리가 길고 가장 험준하며 잔도가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다. 잘 사용되지 않는 길이다.  


    낙곡 루트 : 자오곡에서 출발하여 중간에 갈라져 위수 방면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자오곡 보다 짧으나 도착지가 애매하여 자칫하면 장안과 진창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기 쉽다.  


    야곡 루트 : 기곡 루트를 따라 올라가다 오장원 방향으로 갈라진다. 오장원 공략에 성공한다면 진창과 미현 방향으로 나아가 장안을 공략할 수 있다.  


    기곡 루트 : 한중에서 진창으로 향하는 루트다. 위수 방면 거점 도시인 진창으로 향한다는 장점이 있다. 초한전쟁 때 한신이 이용했던 길이다.  


    기산-가정 루트 : 무도 방면을 지나 천수군, 안정군 등 옹주 지방의 서쪽을 점령하는 방법이다. 가장 안정적이고 넓은 길을 가는 방법이지만 장안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딱 봐도 쉬운 길이 하나 있다. 바로 자오곡 루트다. 중간에 거쳐야 되는 도시들 모두 촉나라 소속이고 험준한 길만 넘는다면 곧바로 장안이다. 실제로 촉나라 장수 중에서 한신의 과거 전략을 기반으로 자오곡 루트 채택을 주장한 장수가 있다. 바로 위연이다.


위연 (출처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촉나라의 사령관은 제갈량이었고, 위나라의 대폭 방면 총사령관은 조진이었다. 하지만 양 측의 거점이 되는 도시의 태수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한중 태수는 위연이었고, 장안 태수는 하후무였다. 형주 의양군 출신의 위연은 유비의 열렬한 지지자로 병졸에서 시작해 촉나라 사령관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상당히 뛰어난 군사 지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불어 촉나라에서 조운과 더불어 가장 용맹한 장수였다. 문제는 급한 성미와 주변 인물들과의 불화였다. 위연은 제갈량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에 반해 장안 태수 하후무는 조조의 친구이자 오른팔이던 하후돈의 둘째 아들이라는 배경과 조조의 사위였다는 점으로 태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능력은 전혀 없었고 여색을 밝히기 좋아했다.


  위연은 제갈량에게 다음과 같이 상소하며 자오곡 계책을 주장했다.




“하후무는 위나라 주군의 사위임에도 겁쟁이인 데다가 지략이 없다고 합니다. 신에게 5천의 병사를 주신다면 곧장 자오에 당도하여 북쪽으로 가 열흘 안에 장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장안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하후무는 곧장 도망갈 것이고 성안엔 문관들 밖에 남아있지 않아 군량을 가지고 도망갈 것입니다. 위나라가 병력을 모으는 데 20일이 걸릴 터, 그사이 공께서 야곡을 빠져나와 충분히 장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위연의 계책이 너무 무모하다며 거절했다. 위연의 입장에서는 그럴싸한 전략을 만들 걸지도 모르지만, 제갈량의 볼 때는 너무 위험했다. 겨우 5천의 별동대로 장안을 점령하겠다는 말이었는데, 이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위연의 개인 능력에 크게 의존해야 했다. 예상과 달리 하후무가 도망가지 않는다면 무려 5년간 모은 촉나라 병력을 소중한 병력이 증발되는 꼴이 된다.

  위나라 입장에서 5천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촉나라 입장에선 꽤나 큰 병력이다. 상대적 약소국 위치인 촉나라는 병사 한 명 한 명 소중히 생각하면서 천천히 북쪽으로 나아가야 했다. 결국 제갈량이 선택한 1차 북벌 루트는 가장 안정적이고 확률은 높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머나먼 길, 기산-가정 루트였다.




P.S.

최대한 정사 삼국지를 기반해 작성했으나 서기 200년대의 자료가 희박해 작가의 각색 혹은 '삼국지연의'의 스토리가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당대 인물들에 대한 이미지 자료가 희박하여 '코에이(KOEI)'사에서 개발한 '게임 삼국지' 시리즈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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