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다 의미 없다
배틀그라운드(배그)는 참 재미있는 게임이다. 최대 100명의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얻고 서로를 죽여 최후의 1명/팀이 되는 것이 목표인데 꽤 사실적인 무기, 지형, 건물, 전투 묘사 외에도 싱글, 듀오(최대 2명/50팀), 스쿼드(최대 4명/25팀) 등 다양한 게임 모드가 준비되어 있다. 비슷한 배틀 로얄 스타일의 게임은 여럿 있었지만 배그만큼 성공한 게임은 없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난 이 게임을 몇 달 전에 접었다. 아무리 해 봐야 이제부터 설명할 세 가지 이유로 인해 결국 시간낭비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그가 최고로 인기를 누릴 땐 동시접속자 수가 300만 명 이상이었지만 이젠 그 10%도 안 되는 인원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많이들 떠나지 않았나 싶다.
모든 FPS(first person shooter: 보통 총을 쏘는 1인칭 액션 게임) 게임에는 핵(hack)이 존재한다. 혼자 하는 게임에는 체력이나 총알 등을 무제한으로 바꿔주는 치트(cheat)가 있지만 이는 어차피 게이머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선택한 것이니 피해를 입는 이도 없고 굳이 비난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문제는 여러 명이 같이 즐기는 멀티플레이어 게임에서의 핵이다.
배그는 탄도학(총구를 떠난 탄환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비행)이 구현되었을 정도로 꽤 사실적인 게임이지만 핵을 쓰는 족속들은 하늘을 날고 순간 이동을 하며 벽과 건물, 산 등을 관통하는 총알을 쏜다. 치터들이 다른 플레이어들의 위치를 모두 파악하고 허공에 대고 쏜 총 때문에 몇 km 떨어진 곳에 있는 순진무구한 플레이어들이 픽픽 쓰러지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쓰는 놈들은 보통 금방 잡히곤 하는데(안 그럴 때도 많다) 문제는 필요한 경우에만 살짝 핵을 쓰는 약삭빠른 치터들이다. 이런 경우 리플레이를 보거나 신고를 해도 잡혀서 계정 영구 정지를 당하기까지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거나 아예 잡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온라인 FPS 업계에서 핵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르는 사람들은 왜 핵, 치터들을 못 잡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분에겐 이 글과 배그의 핵 문제를 설명한 이 문서를 추천한다. 간단히 말해 지금까지 출시된 인기 FPS 중 핵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은 게임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배그의 특성 상 안전 위주로 플레이한다면 최소 20-30분은 공을 들여 살아남아야 하는데 막판에 갑자기 치터를 만나 죽었을 때처럼 황당한 경험은 없다. 나 역시 최후에 단 둘이 남은 상태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어 신고를 한 후 기다리니 며칠 뒤 상대방이 핵을 사용해서 계정이 영구 정지되었다는 메시지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배그의 경우 제작사인 블루홀이 처음부터 하드웨어 밴 등 강력한 제재를 도입해야 한다는 플레이어들의 의견이 많았지만 해결할 능력이 없었거나 아예 방치했다는 의혹이 있다. 특히 핵을 사용하다가 적발되어 영구 정지를 먹어도 다시 CD키를 사서 계정을 만들면 문제없이 게임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치터들이 새로 구입한 CD키의 개수만큼 블루홀의 매출이 올라가기 때문에 일부러 놔뒀다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게다가 유명 스트리머나 프로 게이머들까지 핵을 사용하다 적발되어 업계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다수 생겼고 심지어는 프로 게이머들이 프로 리그에서 치팅을 하는 사례도 나왔다.
배그용 핵의 경우 제작 국가 중 99%가 문제의 그 나라라는 개발자의 설명도 있었는데,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플레이어들이 중국을 아예 서버에서 따로 분리하라는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의 프로듀서는 당시 “인종 차별을 하지 말라”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배그에서의 핵 문제가 옛날 이야기 아닌가 싶은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우주하마 등 유명 스트리머들은 지금도 종종 치터들을 만나 고생한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실력으로 치터들을 때려잡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치터에게 질 수밖에 없다.
모든 네트워크 게임에는 딜레이가 존재한다. 내가 마우스/키보드를 통해 입력한 신호가 내 PC와 인터넷 회선을 거쳐 게임 서버에 도착했다가 다시 상대방 게이머의 PC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각 게이머의 인터넷 회선 속도 및 상태, 게임 서버의 상태/품질에 따라 이 딜레이가 매우 다이나믹하게 변화한다는 점이다.
배그, 오버워치 등의 액션 게임에서는 0.1초, 혹은 그 이하의 시간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배그에서는 거의 동시에 총을 쏴서 명중시켰는데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살아남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데 내가 살면 다행이나 죽을 경우 도대체 왜 죽어야 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을 때가 많다. 게임 디자인 상의 이유로 서로 거의 동시에 총을 쏴서 맞춰도 먼저 맞춘 것으로 판정된 사람은 살리고 다른 사람은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정말 0.xx초의 차이로 내가 먼저 마우스를 클릭했지만 네트워크 혹은 서버의 딜레이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하면 억울하기만 하다. 실력이 좋으면 핵이든 랙이든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 이해할 수 없는 딜레이나 판정 때문에 자주 죽으면 정말 게임하기 싫어진다. 한마디로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모든 온라인 게임은 인터넷 회선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네트워크 및 서버에서 딜레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랙을 최소화하려면 플레이어들과 서버를 한 장소에 두고 직접 랜선을 연결해서 게임을 즐기는 방법밖에 없다. 극단적인 해결책이긴 하지만 순간의 차이로 승패가 결정나는 게임이라면 달리 방법이 없다.
핵과 네트워크/서버 딜레이가 없다고 해도 배그의 독특한 게임 방식, 그리고 플레이어 개개인의 실력 때문에 좌절할 확률은 대체로 높은 편이다. 일단 솔로의 경우 나 외의 모든 플레이어들이 적이므로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듀오나 스쿼드를 주로 하는 이들도 많지만, 내 경우 초기에 좀 하다가 갑자기 팀원이 나가버리거나 지인들끼리 게임할 경우 내가 죽으면 계속 기다려야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점차 하지 않게 되었다. 팀원이 마이크를 아예 쓰지 않거나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적의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조용히 숨어있다가(캠핑) 갑자기 튀어나오는 또 다른 적이 있을 경우 순식간에 죽게 된다. 물론 실력과 운이 따르면 살 수도 있지만 아예 자리를 잡고 발소리를 들으며 내 위치를 파악해서 공격해 오는 적을 이기기는 매우 어렵다. 비단 캠핑 외에도 그냥 실력이 뛰어난 플레이어를 만나서 죽는 경우도 워낙 많다. 사실 죽고 나면 리플레이를 봐도 이게 도대체 핵인지 실력인지 알 수 없다. 요즘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한창 배그를 할 때엔 일단 죽으면 바로 신고를 하곤 했는데, 생각보다 높은 비율로 “비정상적인 게임 플레이 패턴에 따른 임시 이용 제한 조치”나 아예 “영구 정지” 처분을 받은 플레이어들이 나와 놀라곤 했다.
결국 핵쟁이들+실력이 뛰어난 한국 플레이어들이 도사리고 있는 한국/일본 서버에서 게임을 하다 보니 스스로 한계를 느꼈다. 그것도 매우 자주.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난 배그를 접었다. 울티마 온라인 이후 이렇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온라인 게임은 처음이었지만 뒷맛이 뭔가 씁쓸하다. 요즘엔 가끔씩 리플레이를 보며 처절했던 과거를 추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