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량만 지키면 맛있고 즐겁다
술을 마시면 종종 기분이 가라앉았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 시절로 기억한다. 취하면 심하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스트레스가 쌓여 있는 상황에서 술을 마셨거나 함께 마시던 사람들과의 대화가 별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에는 새롭게 생긴 PC 통신인 나우누리가 한창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오프라인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관심이 있는 주제가 나와 비슷하거나 말이 잘 통하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단순히 모임을 위한 모임은 나와 맞지 않는다.
주량 파악이 안 되던 시절에는 몇 번 필름이 끊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술이 약해지기도 했고 내 주량을 확실히 알고 있어서 다음 날 살짝 괴로워지는 정도로 조절이 가능해졌다. 요즘엔 기분이 괜찮은데 더 즐거워지고 싶을 때 술을 마신다. 반대로 스트레스가 쌓였거나 감정 상태가 별로일 때 음주를 하면 결과가 좋지 않다. 그럴 땐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우울해지거나 살짝 짜증이 나던 시절이 가고 아예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던 시기를 거쳐 지금은 주 1~2회 정도 술을 마시는 듯하다. 날짜를 정해서 마시는 것은 아니기에 편차가 있으며 일본에 가서 지인들을 만나면 3~4차까지 가기도 한다. 마시는 술의 종류도 가지각색이다. 맥주, 소주, 일본 쇼츄나 니혼슈, 위스키, 칵테일 등 그날 그날의 기분과 가게에 따라 마신다. 양은 딱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만 조절한다.
함께하는 사람들도 과거와 달라졌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실 때는 술과 함께 대화를 즐기고, 가끔 혼자 마실 때는 요리와 술의 맛을 음미한다. 그리고 정말 친한 사람들이 아니면 가능한 한 같이 마시지 않는다. 어색한 술자리가 생길 때도 있지만 낯가림이 있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불편하다. 살다 보면 각종 모임이나 회식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런 경우엔 가능하면 간단히 끝내곤 한다.
그런데 과거와 큰 차이가 생겼다.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눌 때의 즐거움이 훨씬 커졌다. 일단 자주 만나지 못하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그리고 그냥 서로의 공통 관심사, 근황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이게 한 10년 전보다 훨씬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술을 마시면 말수도 많아진다. 그래서 2시간 넘게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가끔 졸리거나 피곤해하는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 살짝 미안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일단 DNA, 나이, 그리고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커진 것이 원인인 것 같다. 그리고 친한 친구라 해도 일에 치이다 보면 자주 만나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술을 마시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요즘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술을 즐기게 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 세상엔 맛있는 술이 참 많기 때문이다. 쏘주잔을 기울이며 "오늘은 술이 참 다네"하고 말할 때의 기분을 나타내는 맛이 아니라, 실제 맛이 뛰어난 술이 많다는 뜻이다. 여러 가게들을 찾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노력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미각 훈련이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러다 보니 덩달아 술맛도 알게 되었다. 물론 전문 음식 평론가나 유명 블로거들과의 비교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술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게 됐다.
진짜 맛있는 술을 마실 때는 굳이 안주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맛있는 요리가 있다면 금상첨화지만 진정 맛과 향이 좋은 술이라면 안주의 존재감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위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에 쏙 드는 술을 찾아내면 기분은 좋지만 다음날의 숙취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살짝 두려움이 느껴지곤 한다.
IPA (India Pale Ale)는 쉽게 말해 홉(hop) 향이 강하고 진한 맥주를 말한다. 보통 몰트(malt: 맥아)로 단맛을, 홉으로 향과 쓴 뒷맛을 추가해서 밸런스를 잡는다. 이 술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에 인도에 살고 있던 영국인들을 위해 보존성이 좋은 맥주를 만들다가 탄생했다고 한다(IPA의 탄생 비화는 이 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처음 접했을 때는 별 감흠이 없었지만 멕시칸 음식점에서 타코, 치미창가 등을 먹으면서 우연히 함께 마신 IPA가 너무 맛이 괜찮아서 그 후로는 일반 맥주보다 IPA를 훨씬 좋아하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IPA는 위의 사진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Dogfish Head 90 Minutes Imperial IPA. 도수가 다소 높으며 나에게 있어 IPA는 Dogfish Head 90 Minutes와 나머지로 나뉜다. 그 정도로 맛이 진하고 깊으며 향도 강한 편. 한 모금 들이키면 마치 아포가토 혹은 샤케라또를 먹는 듯한, 찐득하지만 깔끔하고 달콤하며 더 마시고 싶어지는 신비로운 맛이 난다.
국내에서도 몇 년 전부터 IPA를 판매하는 곳이 많아져서 마시기가 쉬워지긴 했다. 그런데 모든 수입품이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IPA 가격은 살벌할 정도로 비싸서 미국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찾아서 마시고 오는 편이다. 우리나라의 마트에서도 국내산 IPA를 가끔 보는데 아쉽긴 하나 마실만 하다.
참고로 IPA는 섭씨 10~15도 정도로 해서 마셔야 제맛이 난다. 맥주 마니아들은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지 않은 맥주는 아주 차갑게 해서 마셔라"는 말을 할 정도로 온도에 신경을 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싼 술집에 가서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이 있는 편인데 잘 찾아보면 저렴하면서도 맛과 향이 좋은 위스키는 얼마든지 있다. 나는 단맛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지 잭 다니엘스가 제일 마시기 좋고(괜히 많이 팔리는 게 아니다) 조금 고급스럽게 마시고 싶다면 글렌피딕 21년이나 발렌타인 21/30년도 좋다. 그런데 일부 싱글 몰트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아일레이 위스키(Islay whiskey: 라프로익 등이 유명)나 이제 구하기도 힘들다는 히비키 21년은 스트레이트로 마시니 특유의 향이 너무 강해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히비키 21년의 경우 온더락이 훨씬 좋았다.
스트레이트로 마신 후 웃음이 나온 위스키는 위쪽에 있는 글렌드로낙(Glendronach)인데 셰리 나무로 만든 통(cask)을 써서 마치 꽃이나 과일이 들어간 듯 싱그러운 향이 난다. 그런데 인기가 별로 없는지, 아니면 회사의 경영 상황이 별로라 그런지 시중에서 찾기가 어렵다.
이 글의 타이틀에 쓰인 올드 패션드(Old Fashion)도 좋아한다. 이 칵테일은 버번(bourbon: 옥수수 위스키) 혹은 호밀(rye) 위스키에 각설탕, 비터(bitter)라는 리큐어, 절인 체리 등을 넣고 오렌지나 레몬 껍질로 향을 더해 만든다. 이 술은 주로 후쿠오카의 바에 가서 마시는데 이곳은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사람만 갈 수 있는 곳이라 공유할 수 없어 아쉽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피크이지 몰타르에서 마신 올드 패션드가 괜찮았다. 이곳은 190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하던 밀조주 판매점을 컨셉으로 한 바인데 실내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그런데 검색하면 사진이 꽤 나온다). 사진에 보이는 문은 밖에서 열 수 없고 노크를 하면 직원이 작은 틈새로 손님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열어준다. 입장 방식이 특이하지만 문은 다 열어 주는 듯하다. 구비된 주류도 많고 독특한 분위기가 괜찮으니 애주가라면 한 번 가 보시길.
흔히 사케라 불리는 일본 술. 도정한 쌀로 만드는데 쌀을 깎아낸 정도, 양조 중 술을 추출한 단계, 변질 방지를 위한 가열 처리 여부 등에 따라 이름이 굉장히 길고 복잡해져서 나처럼 공부 좀 해 보려는 이들을 괴롭게 한다. 양조회사는 물론이고 하나의 회사에서 만드는 니혼슈의 종류는 더더욱 많으므로 이 술에 대해 잘 아는 지인에게 묻거나 니혼슈 전문점에 가서 사장님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추천한다. 나는 사진 왼쪽부터 차례대로 카메이즈미(亀泉) CEL-24, 센킨 카메노오(仙禽 亀ノ尾), 오니얌마 겐슈 다이긴죠(鬼山間 原酒 大吟醸) 등을 좋아한다. 특히 카메이즈미 CEL-24는 가볍고 달콤하며 은은한 과일향이 일품이다.
니혼슈는 병 단위로 주문을 해야 하는 가게가 대부분이라 좀 부담이 되는데 최근 잔으로 판매하는 곳들이 생기고 있다. 양재역 부근의 니혼슈바 슈토, 논현동에 있는 기분 등이 그렇다. 두 가게의 사장님들 모두 상당한 내공의 니혼슈 전문가이시기 때문에 원하는 스타일을 얘기하시면 여러분에게 맞는 니혼슈를 찾으실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니혼슈는 굉장히 섬세한 술이라 맛이 강한 안주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맛이 센 음식이나 술을 좋아한다면 본격적인 처음 니혼슈를 마셨을 때 밍밍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검색을 좀 해 보면 우리나라 니혼슈 마니아들이 작성한 양질의 정보가 많이 나오므로 참고하시길. 총 수천 가지가 넘는 니혼슈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공부할 꺼리는 참 많다.
쇼츄란 일본의 소주를 말한다. 소주는 크게 증류식과 희석식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소주는 대부분 희석식이라고 보면 된다(안동소주, 문배주 등 예외도 있다). 반대로 칵테일이나 담금주용이 아닌 일본의 일반적인 쇼츄는 증류식이 많다. 아무튼 두 나라의 소주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어 몇 줄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우리나라 소주가 일본 쇼츄를 이기고 있다는 것.
일본 쇼츄는 그 재료가 다양해서 비교하며 마시는 재미가 있다. 보통 고구마, 보리, 쌀, 옥수수, 흑설탕, 메밀, 감자, 밤 등이 쓰이는데 재료가 같아도 메이커나 상품에 따라 마셔 보면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 소주보다 원재료의 향이 강하고 맛이 그리 달지 않아 처음에는 적응이 어려울 수 있는데 얼음을 넣거나 물을 타서 마시는 방법을 추천한다. 일본 요리는 달달한 경우가 많아 잘 고른 쇼츄와 함께 먹으면 참 좋다.
왼쪽은 큐슈 미야자키현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고구마 쇼츄인 쿠로키리시마(黒霧島). 이 쇼츄는 고구마 향이 강하지 않고 맛이 달달한 편이라 얼음이나 시원한 물을 좀 타서 마시면 은근히 잘 들어간다. 오른쪽은 한정판 옥수수 쇼츄인 츠키요노후쿠로(月夜の梟: 달밤의 부엉이). 굉장히 세련되고 부드러운 버번(bourbon)의 느낌이 났다. 지금도 자꾸 생각나는 술.
위의 쇼츄는 미야자키현 바로 옆에 있는 카고시마현에서 만들어지는 사츠마 시라나미(さつま 白波)와 쿠로시라나미(黒白波)이다. 사츠마 시라나미는 쿠로키리시마에 비해 고구마 향이 강하고 여운이 많이 남는 편인데, 좀 더 마시기 편한 쿠로키리시마가 인기를 얻자 이에 대항하여 내놓은 것이 오른편의 달달한 쿠로시라나미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니 단맛을 찾게 되나 보다. 나도 쿠로시라나미를 더 좋아한다.
참고로 쇼츄의 종류는 상품명으로 구분했을 때 수백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쇼츄를 병으로 판매하는 곳은 많지만 잔술을 내는 곳은 논현동 기분 정도인 듯하다. 이곳에 구비된 쇼츄의 종류는 아래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꽤 많은 편이다.
곧 우리나라의 증류식 소주도 시도해 보려고 하는데, 이 글을 보니 명인 안동소주를 할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가 있다. 몇 병 사서 마셔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눠줄까 한다.
모든 것이 과하면 좋지 않지만 술은 특히 그렇다. 조절할 줄 알면 우리에게 큰 즐거움을 주고 인간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지만 과음하면 건강을 해치는 것은 기본이고 사람의 생명이 좌우되는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술을 마시고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을 심신미약 등의 사유로 경감해 주는 이유를 모르겠다.
위의 사진은 미국 모 주류 판매점(liquor store)에 있는 맥주 저장고의 일부를 찍은 것이다. 이쯤 되면 주당들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이 저장고에는 냉각 설비도 붙어 있다. 술의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 위에서 말한 Dogfish Head 90 Minutes IPA가 한 병에 3천 원 수준이다. 미국 술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나라에선 보통 만 원이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한 술을 경험할 수 있는 건전한 가게들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
적당한 술은 맛있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