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친 현와이프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 아내와의 만남도 그랬다. 처음 가 본 뮤직 페스티벌에서 친구의 친구로 자연스럽게 만났는데,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사실 어색할 틈조차 없었다. 공연장 안은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우리는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각자의 세계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는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공통의 관심사가 많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린 빠르게 가까워졌다. 같은 야구 응원팀, 같은 취미, 같은 게임 취향 등 만날 이유가 계속 생겨났다. 썸을 타는 게 익숙해질 무렵, 아내가 먼저 내게 고백을 했다. 사실, 아주 약간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갑작스럽게 밀려든 부담감에 나는 그만 거절해버리고 말았다.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을 차버린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보다 조금 가까웠던 사이에서 친구보다 조금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
멀어진 3년 동안 우리는 거의 연락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 3년 내내 단 한 번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반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번은 그 사람과 함께 뮤직 페스티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공교롭게도 그 시절 ‘친구보다 조금 멀었던’ 아내를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때의 어색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내는 지금도 그 일을 두고 나에게 말한다.
"어떻게 나를 차고서 바로 다른 사람이랑 연애를 할 수 있었어?"라고. 그러나 나는 그때의 내 심정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의 아내와 다시 연애를 시작한 건, 다른 사람과의 연애가 끝난 직후였다. 좋은 이별은 아니었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헤어진 뒤에 문득 아내가 생각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리 좋게 봐도 나는 나쁜 놈이었다. 아내 역시 나를 좋게 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다시 나를 만나주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만, 우리의 과정은 조금 특별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동거를 시작했다. 물론,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였다. 6평 남짓한 원룸은 둘이 함께 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좁지만 필요한 건 다 있었고, 매일 맛있는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던 그 시절은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풍요로웠던 시간이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이사한 다음 날, 아내는 임신 소식을 전해주었다. 자다 깬 내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고 아내가 나중에 웃으며 얘기해줬다. 연애부터 결혼까지, 사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제서야 비로소 '가족'이 된 것 같았다. 둘이 살 때보다 풍요롭진 않았지만, 훨씬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은 남편으로서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아내는 그 힘든 과정을 묵묵히 견뎌냈다. 출근하는 나를 위해, 정말 도저히 몸이 버텨내지 못할 지경이 될 때에만 조심스럽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두운 새벽에 홀로 버텨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퇴근 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그리고 주말엔 최대한 함께 분담하려 노력했다. 둘째가 태어나고 몇 년이 흐를 때까지, 우리는 쉴 틈조차 거의 없었다.
이제는 내가 살림을 하고, 아내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10년 동안 내가 짊어졌던 책임을, 이제는 아내가 함께 나눠 지고 있다. 수많은 대화 끝에 내린, 아내의 단단한 결심이었다. 언제나 묵묵히 나를 뒤에서 서포트해주고, 아이들을 돌보며 집을 지켜왔던 그 역할을, 이제는 내가 해주어야 할 때다. 훗날 내가 다시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아내의 노력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건강한 가족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내가 그녀를 선택한 순간부터 짊어진, 지극히 당연한 나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