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즈 Jun 03. 2020

그렇게 살다가는 배달이나 하겠지

2020년 6월 3일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우리는 전보다 더 빠르고 편리하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발전을 만들어낸  값싼 노동력을 거래하고 소비자의 권리라는 이름 아래 작은 개인이 누군가의 갑이 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지는 기이한 구조였다.


그런 구조의 산물들이 바로 우리의 삶에 스며든 혐오들이다. 예컨대 그렇게 살다가는 배달이나 하게  거라 말처럼 말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탄생이 없었다면 우리 곁에 나돌지 않았을 그 문장. 이제는 더 가볍고 당연해진 비난과 조롱은, 마치 성취하지 못한 하류의 인생은 형태가 정해져 있으며 그건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에’ 살게 된 삶이라고 몰아붙힌다. 우리가 이용하는 것은 ‘노동력이지 ‘노동자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도 함께 구매한 것처럼 갑의 가면을 쓴다. ‘선택조차   없었던 상황 생각도 거론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문화가 된 비아냥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일이 아니기에. 이 구조가 괴롭히고 죽이는 이는 내가 아니기에.


그러나 사실 그 무의식이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희생자가 되기 싫어 구조의 모양에 몸을 끼워맞추는 좀비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어느 이름 모를 경비원의 죽음 앞에서도 나는 나 자신의 모순을 본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약자의 아픔을 문득 잊고 어디선가  다시 갑의 얼굴을 하는 우리 모두가 가해자다.



2020년 6월 3일, 짧은 글 긴 생각
매거진의 이전글 제3자가 부여하는 가해의 정당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