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3일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우리는 전보다 더 빠르고 편리하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발전을 만들어낸 건 값싼 노동력을 거래하고 소비자의 권리라는 이름 아래 작은 개인이 누군가의 갑이 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지는 기이한 구조였다.
그런 구조의 산물들이 바로 우리의 삶에 스며든 혐오들이다. 예컨대 “그렇게 살다가는 배달이나 하게 될 거라”는 말처럼 말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탄생이 없었다면 우리 곁에 나돌지 않았을 그 문장. 이제는 더 가볍고 당연해진 비난과 조롱은, 마치 성취하지 못한 하류의 인생은 형태가 정해져 있으며 그건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에’ 살게 된 삶이라고 몰아붙힌다. 우리가 이용하는 것은 ‘노동력’이지 ‘노동자’가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노동력을 생산하는 노동자도 함께 구매한 것처럼 갑의 가면을 쓴다. ‘선택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은 생각도 거론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문화가 된 비아냥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일이 아니기에. 이 구조가 괴롭히고 죽이는 이는 내가 아니기에.
그러나 사실 그 무의식이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죽어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희생자가 되기 싫어 구조의 모양에 몸을 끼워맞추는 좀비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어느 이름 모를 경비원의 죽음 앞에서도 나는 나 자신의 모순을 본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약자의 아픔을 문득 잊고 어디선가 또 다시 갑의 얼굴을 하는 우리 모두가 가해자다.
2020년 6월 3일, 짧은 글 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