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방랑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즈 Oct 11. 2020

열여덟, 세상을 학교로 삼다 - 베트남 퐁냐(1)

1-10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시즈의 방랑 일기 ; 동남아편 >

    190516~190517 : 베트남 퐁냐 (Phong Nha, Vietnam)



#이 글 전의 이야기


하루 종일 이동한 끝에 우리는 꼭두새벽이 되어서야 마침내 아시아 최대의 카르스트 지형이 있는 퐁냐케방 국립공원이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퐁냐에 도착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글과 함께 들으면 좋은 이야기 음악 : Fairport Convention - Who Knows Where The Time Gose?




새벽녘에 누운 해먹에서 동이 트는 걸 지켜봤다.

 처음 퐁냐에 도착했을 때, 사장님 가족들이 숙소에 상주하지 않는지라 우리는 덥고 축축한 날씨를 견디며 마당 데크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는 해먹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려고 했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온몸을 덮치는 모기들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몸상태였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안 좋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험난한 배낭여행에 도전한 탓이었을까? 몸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퐁냐 도착 첫날부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계속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기력이 전혀 없었다. 혹여나 말라리아 등이 아닐까 걱정하며 내 상태를 살피는 친구들에게 무척 미안할 따름이었다. 아글라이와 밍키는 의사이신 본인들의 어머니에게 각각 전화를 걸어 내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다행히 말라리아는 아닐 거라는 답변이 돌아왔으나, 일단은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만약 나아지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나를 배려해 숙소에서 쉴까 고민하던 친구들을 만류하고 안심시킨 끝에, 혼자 호스텔에서 남게 되었다. 동행인 없이 홀로 시간을 보내는 건 여행 이래 처음이었다. 왠지 어색한 기분 속에 일단 낮잠을 청한 뒤 일어나니 한결 몸이 개운했다. 아파도 식욕 감퇴 같은 건 없는지(사실 동남아 여행을 하며 제대로 밥을 먹은 날이 손에 꼽힌다. 위장이 약한 탓에 조금만 음식을 잘못 먹어도 배탈이 났고, 결국 여행이 끝날 무렵엔 하루에 한 끼도 잘 먹지 못 할 만큼 위가 작아졌다.) 배가 고파 숙소에서 볶음밥을 시켜 먹었다. 물론 소금이 그대로 씹혀서(...) 거의 못 먹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던 내가 꺼내 든 건 태블릿 pc였다. 맨 처음 여행을 출발할 때 글을 쓰기 위해서 챙긴 물건이었지만 바쁜 일정과 낯선 곳에서의 긴장감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키보드를 따로 가져오지 않아서 글을 쓰기에도 무척 불편했다. 그래서 환승을 위해 닌빈에 들렀을 때 전자기기 매장에 들러 키보드를 샀던 참이었다. 영어가 서투르던 직원들이 "Bluetooth?"라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건넨 키보드를 구매해 드디어 첫 태블릿 사용까지 다다랐던 것이다. 여전히 머리도 아프고 피곤했으나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글을 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두근댔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르게 키보드는 블루투스 연결이 되지 않았다. 페어링을 위해 키보드를 이리저리 살펴봐도 블루투스 버튼이 없었다.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직원들이 자신 있게 건넨 590동짜리 로지텍 키보드는... 블루투스 키보드가 아니라 usb를 pc기기에 연결해 사용하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키보드 usb가 태블릿에 호환되지 않았다.


 난 문제를 인식하고 뒷목을 잡았다. 짐만 하나 더 늘어난 셈이잖아! 황당함에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고의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어제 닌빈에서 내게 키보드를 판매한 직원들이 미워졌다. 블루투스냐고 묻는 내 말에 왠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맞다고 대답하더라니...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닌 otg 케이블. 사진 출처 티스토리

 정신을 차리고 일단 빠르게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러던 중 otg케이블을 이용해 usb를 호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부끄럽지만 난 엄청난 기계치라서, 이 날 전까지는 otg케이블이 뭔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꼼꼼하게 짐을 챙겨왔다한들 내가 otg케이블까지 가져왔을 리가. 차라리 포기했으면 편했겠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그냥 포기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그러던 중 문득 호스텔 사장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친절한 사장님이 체크인 당시 퐁냐는 한적한 시골이라 이동이 어려우니 마을을 둘러보고 싶으면 자전거를 이용해도 된다고 얘기했던 것이다. 나는 사장님에게 허락을 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자전거에 올라타 호스텔을 나섰다. 친구들이 외출하며 방 열쇠를 가져가지 않았기에 만약 돌아오는 게 늦어진다면 친구들을 기다리게 만들지도 몰랐다. 대충 구글 맵을 눈대중으로 확인한 후 마을에 있는 유일한 휴대폰 가게를 향해 열심히 달렸다. 무척 한적한 마을이다 보니 가로등도 거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울수록 이를 더 악물고 페달을 밟았다.


 철인 3종 경기에 임하는 선수 수준으로 숨도 안 쉬고 달린 끝에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는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거의 구멍가게에다가 가판대도 밖에 있어 노점에 가까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에서 내리는 낯선 외국인의 모습에 놀랐는지 가게 사장님인 아주머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otg 케이블이 없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영어가 통할 리 없었다. 난 얼른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otg케이블 사진을 휴대폰에 띄워 아주머니께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세 가지 포트가 달린 하얀색 케이블이었다. 난 얼른 돈을 지불하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정신없이 페달을 밟아 숙소로 돌아온 뒤 설레는 마음으로 usb를 케이블과 연결... 하려고 했는데.


 헐 이게 웬일. 내가 사 온 건 otg케이블이 아니었다! 기계치의 명성에 걸맞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otg케이블이 아닌 충전 포트를 사 온 것이다. 게다가 그 포트는 애플 기기와 삼성 기기 모두 연결 가능하도록 세 가지 핀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생경한 모양새에 그저 내가 찾는 게 맞겠거니 하고 구매한 상황이었다. 바닥에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난왜이럴까학교다닐때기술시간에열심히배울걸평소에기계공부도좀하고4차산업혁명시대의인재가되기위해노력좀할걸..............


 근데 이쯤 되니 어떻게든 otg케이블을 구해야만 직성이 풀릴  같았다. (안 그러면 정말 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속어를 뱉으며 방 밖으로 나와 다시 자전거로 아까 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사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함께 전속력으로 달려 가게를 찾아갔다.


 거의 <분노의 질주> 뺨치는 라이딩을 펼쳐 이번에는 아까 간 휴대폰 가게 바로 맞은편에 있는 다른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그곳 사장님 역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난 그저 말없이 아까 찾은 otg케이블 사진을 보여드렸다. 사장님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가게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이번에는 확실히 otg케이블이었다! 몇 번이고 깜 언(Cám ơn, 베트남어로 '감사합니다')을 외친 다음 일단 숙소로 내달렸다. 다행히 친구들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한숨 돌린 후 마음을 졸이며 케이블을 연결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테이프가 감긴 낡은 otg케이블이었지만 다행히 제 몫을 잘 소화해냈다. 그렇지만 그다음 관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블이 연결되었음에도 키보드는 꿈쩍도 않고 마우스만 작동이 됐다. 지금 나랑 장난해...?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머리를 굴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키보드와 마우스의 배터리를 바꿔 껴보았다.

닌빈에서 산 키보드와 지인 분이 빌려주신 태블릿. 여행 내내 애증의 2인방.

 그리고 드디어 키보드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할렐루야(aka.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울려 퍼졌다. 거의 노벨상이라도 수상한 사람처럼 감격에 겨워하던 나는 며칠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태블릿이 오래되어서 키보드 usb를 연결하면 충전을 하지 못해 20분 만에 전원이 꺼져버린다는 사실을... (장난해?)


 어찌 되었든 간에, 그때 산 키보드는 아직도 우리 집에 잘 모셔져 있다. 앞으로 사용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날의 경험은 나의 악착같은 근성을 발견하게 한 독특하고 어이없는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교훈도 얻었다. 첫째, 여행 가기 전에 가져갈 전자기기를 꼼꼼히 체크해보자. 둘째, 그러나 무거운 전자기기는 그냥 가져가지 말자. 제발 가져가지 말자. 끝!



To be continued…
매거진의 이전글 열여덟, 세상을 학교로 삼다 - 베트남 캇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