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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방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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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즈 Oct 02. 2020

열여덟, 세상을 학교로 삼다 - 베트남 캇바

1-09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시즈의 방랑 일기 ; 동남아편 >

    190513~190515 : 베트남 캇바 (Cat Ba, Vietnam)



#이 글 전의 이야기

사파를 떠나는 버스 탑승 직전 독일 친구 마리아를 만났다. 목적지가 같은 마리아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후 슬리핑버스를 타고 꼬박 밤을 새워 드디어 도착한 새로운 도시 캇바. 아름다운 풍경은 나중에 감상하기로 하고, 우리는 우선 도미토리에서 잠을 청했다.


글과 함께 들으면 좋은 이야기 음악 : Karla Bonoff - The Water Is Wide




도미토리 복도에서 바라본 바닷가


 비몽사몽 멍한 정신으로 잠에서 깨니 어느덧 오후에 접어든 시간이었다. 나는 바깥 풍경이 그대로 보이는 작은 복도로 나갔다. 창문 너머에 존재하는 반짝이는 바닷가를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는 베트남이 자랑하는 최고의 자연유산 하롱베이잖아! 캇바 아일랜드 자체가 거대한 만인 하롱베이 안에 자리 잡고 있으니 어찌 보면 내 눈앞의 저 눈부신 풍광도 하롱베이였다. 각 나라의 자연환경에 대해 배우던 사회 시간에 책으로만 보았던 하롱베이가 현실이 되다니(심지어 자퇴를 하고 오게 되다니) 역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구경을 했을까? 나는 야외에 위치한 호스텔 식당으로 나갔다. 먼저 일어난 밍키와 조세핀이 호스텔의 다른 숙박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더 쉬겠다는 아글라이를 제외하고 남자 숙박객과 우리는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해변으로 향했다. 드넓게 펼쳐진 만이 무척 아름다워서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난 수영복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수영복이라고는 한국 워터파크에서나 입는 래시가드 세트가 전부였다. (아직 유교걸 마인드가(...) 강했던 그때의 나에게 수영복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접근 불가 아이템이었다.) 결국 나는 해수욕장 한편에 위치한 작은 가게에서 수영복을 사기로 했다. 함께 온 밍키와 조세핀은 내 얘기를 듣고 선뜻 수영복을 골라주겠다며 같이 가게로 들어왔다. 가게의 규모가 크지 않은 만큼 수영복 종류 역시 몇 개가 전부였는데, 거기서 발굴하듯이 찾아낸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이 나의 짝꿍이 되었다.


캇바 아일랜드의 해변. 하롱베이의 카르스트 지형이 보인다.

 어쨌든 셋이 합심해서 고른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들어가니 관광객들과 베트남 사람들이 뒤섞여 각자의 방식으로 휴양을 즐기고 있었다. 바쁘고 복잡하던 하노이, 고즈넉한 순수함이 아름답던 사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캇바의 백사장에서 뜨거운 태양빛을 받고 있으니 이제야 좀 놀러 온 기분이 났다.


 하지만 진짜 캇바 여행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세계 7대 절경이라는 하롱베이(Ha Long Bay) 투어! 하루 종일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채운 우리는 이튿날 오후에 진행되는 하롱베이 투어를 신청했다. 슬리핑버스를 함께 탔던 독일인 친구 마리아 역시 우리의 동행자였다.


 투어 당일 날 아침 하롱베이 투어를 떠나기 전 독특한 여행지 한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바로 'Hospital Cave', 즉 '동굴 병원'이었다. 20세기의 엄혹하고 거대한 역사로 기억되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적군의 시선이 닿지 않는 동굴에 건설한 병원인 Hospital Cave. 더운 날씨 탓인지 관광지임에도 우리 외에는 다른 방문자가 없었던 그곳은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구슬픈 감정을 일으켰다. 동굴 안을 채웠을 다친 병사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전쟁은 시대가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영원히 남아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Hospital Cave 관람을 끝마치고 발걸음을 옮기려던 우리가 멈춰 선 이유는 다름 아닌 '길' 때문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장소이다 보니 도로에는 차는커녕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았는데, 약간 안개가 낀 오묘한 회빛의 하늘과 도로 주위로 펼쳐진 무성한 나무와 수풀들 덕분에 독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야말로 완벽한 포토 스팟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카메라를 가지고 나섰던 나는 내 소중한 동반자인 미러리스로 친구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이제 갓 열여덟과 스물 언저리에 접어든 청춘들에게 여행지에서 남긴 아름답고 멋진 사진은 무척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니까.)


Hospiatl Cave 앞의 한적하고 신비한 도로에서 트래블 메이트들과. 왼쪽 사진부터 차례로 Josephin, Minki, Aglai(조세핀, 밍키, 아글라이)


 그리고 다시 호스텔로 돌아간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베트남의 자랑이라는 하롱베이 투어를 시작했다! 우리의 일정은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서 중간에 한 번 더 배를 갈아탄 후 하롱베이 안에 위치한 몽키 아일랜드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오는 것으로 정해졌다.


 여행 후기에서 자주 보았던 으리으리한 크루즈나 독특한 카약은 아니었지만, 온전히 다섯 명이서 아름다운 하롱베이의 정취를 느끼는 시간이 무척 인상 깊었다. 햇살이 반사된 눈부신 물결과 자연이 만들어낸 카르스트 지형 사이로 지어진 수상가옥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갑판 위에 앉아 거대한 풍광을 둘러보며 뺨을 스치는 바람의 향기를 맡는 순간을 과연 살면서 얼마나 자주 누릴 수 있을까? 그것도 진기한 인연들과 함께 말이다. 어쩌면 특별한 일들의 발생보다는 별 거 아닌 것마저도 특별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을 안겨주는 시간 덕분에 여행이란 행위가 찬란한 게 아닐까.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평생 모를 수도 있던 존재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세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점을 유독 사랑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직조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에 여행이 끝난 후에도 내 삶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곳에서 함께한 이들과 겪었던 세계가 인생이란 모험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주니까 말이다.


함께 캇바를 여행했던 독일 친구 마리아. 많은 만남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무척 다정하고 상냥한, 멋진 친구였다.


 투어가 끝난 후 우리는 저녁 식사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칵테일을 마시며 독일과 한국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음 여행지인 퐁냐에서의 모험을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 8일 째인 캇바에서의 마지막 아침, 체크아웃을 끝내고 내가 한 건 의외의 장소인 사파의 마켓에서 구한 한국의 맛 '불닭볶음면'을 먹는 일이었다. 시뻘건 소스와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가 오히려 반가웠다.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이상한 음식을 흡입하는 내가 신기했는지 호기심에 한 입 씩 먹어본 친구들은 전부 발을 동동 굴렀다.

닌빈에서 들른 한국 식당. 순간 한국인 줄 알았는데, 음식을 먹자마자 착각에서 벗어났다.(...)

 신기하게도 한국 음식을 먹은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이동을 하고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무른 닌빈(Ninh Bình)에서, 마리아와 헤어진 후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을 때 닫혀있는 식당들 가운데 한국 식당을 발견했다. 'Hi Korea'라는 문장이 떡하니 쓰인 인테리어 앞에서 먹은 제육볶음(을 가장한 면이 섞인 기이한 고기 요리)과 계란 김밥(이라고 하지만 김밥 안에 들어간 건 상하기 직전인 단무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동안 왠지 새 도시에서도 신기한 좌충우돌 얼렁뚱땅 어드벤처가 펼쳐질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완전히 적중했다.)


어쨌든 캇바는 잔잔하고 상냥한 곳으로 기억된다. 단순히 '베트남 관광의 필수 코스'가 아니라, 거대한 자연과 지나간 역사가 어우러져 느릿하게 돌아가는 장소.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보았던, 캇바 만큼이나 고요하고 정답던 노을을 떠올려보는 오늘이다.



고즈넉하고 정다운 캇바의 노을.


 나는 캇바에서 <사소한 것으로부터 귀중함을 찾는 시선>을 배웠다.



To be continued…

*모든 사진은 직접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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