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방랑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즈 Nov 27. 2020

열여덟, 세상을 학교로 삼다 - 베트남 퐁냐(2)

1-11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시즈의 방랑 일기 ; 동남아편 >

    190516~190517 : 베트남 퐁냐 (Phong Nha, Vietnam)



#이 글 전의 이야기


컨디션 난조로 일정을 쉰 대신 태블릿과의 사투를 벌인 다음 날, 친구들은 퐁냐케방 국립공원 투어를 가고 나는 완전한 회복을 위해 하루 더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드디어 저녁을 먹기 위해 처음으로 숙소를 나선 나와 친구들. 우리는 새로운 여행자들의 등장과 함께 스펙타클한 밤의 시작을 맞게 된다.
글과 함께 들으면 좋은 이야기 음악 : David Bowie - Modern Love




저녁을 먹은 레스토랑

 저녁 식사를 위해 찾은 레스토랑은 그야말로 '힙플레이스'였다. 야외에 마련된 좌석 옆에는 거대한 체스판 모형이 있었고, 인기 많은 식당임을 증명하듯 고급스러운 요리 장비들도 많았다. 날씨가 좀 습하긴 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모든 게 이해가 될 만큼 멋진 곳이었다.


 한껏 이국적인 느낌을 즐기던 중 우리 앞에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났다.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이 그 둘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고, 두 사람 역시 익숙한 듯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이 둘이 바로 친구들이 국립공원 투어에서 만났다던 스위스 친구 안드레와 독일 친구 루이자인 모양이었다. 무척 재미있고 특이한 사람들이라던 애들의 말처럼 둘은 보기에도 에너제틱했다.


 특히 인상적인(이라고 쓰고 요상한이라고 읽는) 첫인상을 남긴 건 안드레였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안드레는 무척 반갑다는 듯 내게 악수를 건네더니, 곧장 한국말로 또박또박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건 이 다음 문장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인이셔." 헐 대박. 난 신기한 눈치로 "진짜?"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안드레가 하는 말.

 

 "농담이양."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 날 보며 다시 안드레가 얘기했다. "근데 나 명예 한국인이야. 비빔밥 X나 좋아해." 뭐지 이 기묘한 문장은. 마치 내가 '나 비빔면 좋아하니까 팔도 회장이야.', '나 애플 폰 쓰니까 팀 쿡의 숨겨진 딸이야.' 하고 말하는 거랑 별반 다를 거 없는 거 아닌가. 그러나 안드레 특유의 졸려보이는 눈동자와 뻔뻔한 무표정 덕분에 나는 끝내 (자존심 상하지만)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한 마디 더 덧붙인 안드레. "맞다. 나 쥐띠지롱."


퐁냐에서 루이자, 안드레와 함께 한 저녁식사

 어쨌든 안드레, 루이자와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즐거웠다. 둘은 시종일관 통통 튀었고, 이때다 싶으면 맥락 없는 아무말을 날렸다. 완벽한 천방지축 콤비였다. 하지만 나는 문득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듣고 충격에 빠졌다. 누가 봐도 친밀한 데다가 함께 여행까지 하는 중인 두 사람이 커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더 어렸던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유교걸인) 나에게 그건 엄청난 센세이션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루이자는 남자친구가 따로 있었다! 유러피안 마인드로 향하는 길이란 정말 멀고도 험한 거구나. 속으로 읊조리며 음료수만 삼킬 뿐이었다.


물구나무를 서는 루이자... 이 장면을 보고 얼마나 웃기고 신기했는지 모른다.

 우리 여섯 명의 정모는 2차로 이어졌다. 레스토랑에서 함께 운영하는 것 같던 야외 펍에는 이미 한바탕 술과 분위기에 취한 여행객들의 노랫소리(를 가장한 괴성)이 가득찬 상태였다. 무대 앞에선 <전국노래자랑>에서나 보던 고속도로 댄스가 한창이었다. 각종 소음 속에 몸을 맡기고 흥을 끌어올리던 친구들 역시 조금씩 알코올과 한몸이 되어갔다. 그 무렵 야외 펍이 폐장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아쉬운 음성이 새어나왔다. 이대로 파하느냐, 아님 3차 장소로 향하느냐. 고민하던 우리는 일단 불꺼진 펍에 남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야외 펍이다보니 개장을 안 한 시간에는 쉬어가는 공간처럼 쓰이는 모양이었다.) 한국의 '진실게임'과 비슷한 '핫시트(hot seat)'게임을 하다보니 분위기는 점점 최고치를 향해 달려갔다. 루이자는 물구나무를 서서 도로를 걷기까지 했다.


 그 때부터였다. 안드레와 밍키 사이에서 번쩍이는 스파크가 튀기 시작한 것은. 동네에서 유일한 클럽으로 3차를 즐기러 가는 순간부터 눈빛을 나누던 둘은 클럽 안에서 로맨틱하게 댄스 타임을 즐기며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여전한 클럽 알러지로 인해(...) 의자에 앉아 친구들의 파워에너제틱모드를 실시간 관람하던 나는 안드레와 밍키의 <라붐> 속 "Dreams are my reality~" 바이브를 또렷이 목격할 수 있었다.(그러나 실제로는 EDM 비트가 클럽을 터뜨릴 듯 우렁차게 울려퍼졌다는 게 함정.) 이미 둘은 설탕 바다를 헤엄치는 에로스와 프시케였다.


 그러나 둘의 쏘스윗 모먼트를 위해 동이 틀 때까지 안드레, 루이자와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침 일찍 다음 도시인 후에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결국 우리의 리더 격인 아글라이가 직접 나서 오늘 모임은 이만 마무리 하자고 말을 꺼냈다. 피곤함에 정신이 흐릿해졌던 나와 조세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취기가 오른 안드레는 그러거나 말거나 밍키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밍키 역시 졸음이 내려앉은 눈을 끔뻑끔뻑 감으며 안드레와 다정한 대화를 나눴다. 어둠이 내려앉아 고요하고 한적한 시골 동네 퐁냐의 클럽 앞 아스팔트 길에서 애처로운 작별 거부가 몇십 분이나 이어졌다. 이러다가는 정말 돌아가지 못 할 판이었다. 벌써 새벽 서너 시가 가까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밍키를 두고 벌어진 지지부진한 줄다리기는 결국 우리의 승리 아닌 승리로 끝났다. 21세기형 로미오가 된 것처럼 "Bye, Love. Have a sweet dream."을 몇 번이나 외치는 안드레를 루이자가 끌고 가고, 우리 역시 밍키를 단단히 붙잡은 채 인적 드문 시골 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의 마스코트인(것 같지만 사실 그러기엔 너무 큰)개 두 마리가 컹컹대며 짖는 걸 피해 후다닥 문을 열고 들어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피로와 안도가 뒤섞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서는 옷만 대충 갈아입고 냅다 침대로 뛰어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스펙타클한 하루였어...'

 베개에 얼굴을 대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이던 내 눈이 스르륵 감겼다. 여행지에서의 운명적 만남. 낭만적인 듯 다이내믹하던 퐁냐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저물었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 열정적인 순간들을 만났던 퐁냐.


나는 퐁냐에서 <청춘의 열정>을 배웠다.



To be continued…

*모든 사진은 직접 촬영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열여덟, 세상을 학교로 삼다 - 베트남 퐁냐(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