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기 전 취미를 배우러 갔다가 같이 집으로 걸어가던 처음 보는 아주머니는 “애기는 어린이집 보내고 온 거야?”라고 물었다. 마지막 출산은 언제 하셨냐고 출산 여부에 대한 질문을 건너뛰고 물어보는 의사도 있었다. 이제 나이가 적은 편이 아니니 당연히 아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아이 없는데요,라고 하고 그러면 상대방은 머쓱해하며 사과한다.
아이가 없다고 하면 그렇구나, 하고 그 주제에 대한 대화가 종결되곤 하는데, 간혹 추가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직접 묻지 않아도 얼굴에 궁금해하는 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자신이 없어서 낳지 않는다고 한다.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러면 낳아보면 별 거 아니다, 낳아 놓으면 어떻게든 큰다는 등의 격려를 듣는다. 조금 친해진 관계(?)가 되어서 내 가족관계를 알게 되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을 연필이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필이 때문에 부모님이 내가 아이를 기르는데 도움을 주시기 힘들어서 그런가 하는 실생활 밀착형 추측도 있었고, 장애인 동생을 둬서 뭔가 가족과 아이에 대해 질리고 정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비관형 추측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연필이에게 미안해지고, 억울해진다. 그러다 정말 연필이가 내 결정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완전히 굳힌 것은 사실 몇 년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그냥, 좀 더 생각해기로 하고 결정을 미뤄뒀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갈수록, 한 살 두 살 더 먹을수록 나는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이 없어져 희미해질 때쯤, 그렇게 아이 없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없다는 건 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거다. 팍팍한 세상에 남편과 둘이 살아나가기도 버거운데 하나의 생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책임을 진다는 건 정말이지 자신이 없다. 그 책임은 어디까지 무한대일까. 나는 항상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살아왔는데. 이 무한한 책임은 짊어질 자신이 없다. 내가 태어나게 했으니 태어난 아이에 대해 무한대로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이가 너무 뛰어나고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다면 나는 그 재능을 잘 꽃 피우게 할 수 있을까. 아이가 아프거나 장애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최선의 교육과 치료를 보장해줄 수 있을까. 잠시라도 아이를 방치하지도, 아이에게 잘못된 선택을 하지도, 아이를 조금이라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온 힘을 다 쏟을 수 있을까. 그렇게 사회 속에 속한 하나의 인간으로 내가 잘 키워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엄마를 떠올리곤 했다. 내가 가장 오래 자식을 보살피는 걸 본 건 나의 엄마니까 당연하다. 막연히 잘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보다 엄마처럼 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더 구체화된 질문이었다. 나는 엄마가 연필이게 하는 만큼,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나에게 했던 만큼 정성과 사랑을 쏟아서 키울 수 있을까. 잠을 잘 못 잔 얼굴로 연필이를 챙기면서 내가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조잘거리는 걸 들으며 그랬구나, 아 정말? 그래서 지난번에 말했던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아이 없는 삶을 결정한 것이 연필이 탓이라기보다는 구체화된 연필이와 나를 보살핀 엄마의 모습에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하는 게 맞다.
아이를 낳는 것 대신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가끔이라도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아이들에게 쓰일 모금활동에 기부하기, 걷다가 아이들에게 위험해 보이는 게 있으면 치우거나 관리 주체에 연락하기, 모르는 아이가 말을 걸면 상냥히 답해주기 같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 물론 이런 생각을 했다가도 작은 악마처럼 구는 아이들을 맞닥뜨리면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피하게 되지만. 오늘도 이런 걸 실천하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