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레 Sep 07. 2023

며느리의 충성심

어릴 때부터 수경은 충성심이 남다른 아이였다. 어떤 인연이든 마지막까지 먼저 배신을 하는 일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속이고 떠나갔지만, 헤어짐의 원인은 자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단 한 명의 남자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결혼을 했다. 술을 마시고 길바닥에 낙엽처럼 굴러다닐 때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다. 배려심이 대단한 남자구나. 이번 생은 남편 운이 좋은 것 같았다. 그 배려심이 시어머니로부터 온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비하면 수경의 술주정은 아이 걸음마에 불과했다.


아직 해가 뜰 시간도 아닌데, 수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벨 소리만 들어도 발신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 두었기에 수경은 일부러 자는 척한다. 도미노처럼 남편의 전화가 울렸고,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거실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분 뒤 그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새벽어둠을 뚫고 차를 몰고 나가, 출근 시간 전에 돌아왔다. 목적지는 줄수록 더 원하는 사람, 시어머니다.


어디 갔다 왔냐고 묻지 않았지만, 남편은 물어봐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궁금한 것들은 사막의 모래처럼 말라버린 지 오래다. 질문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어제 엄마가 죽고 싶다고 하셔서…… 다녀왔어.” 하루 이틀인가. 그녀의 엄살을 들어주는 날들이. 도대체 세상 어떤 엄마가 그런 이유로 새벽 4시에 출가한 지 오래인 막내아들을 집으로 부르겠는가.


그녀는 걸핏하면 이제 흰머리가 희끗한 아들들을 불렀다. 혈압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이유로 쓰러지거나 병원에 입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혼 초에는 수경도 걱정을 했다. 일찍 혼자되셨기 때문에 같은 여자로서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남편이 사흘 정도 어머님을 집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통보했을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원기 회복에 좋다는 음식들을 검색 창에 쳐보며, 삼시 세끼를 고민했다.


사흘만 있기로 했던 사람이 일주일을 넘겼다.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꼬박꼬박 문안인사를 드리라는 것인지, 아침에 일어나서도 방문만 열어두고 나와보지 않는 게 특이했다. 그러면서 방에 있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계속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다섯 살이 되는 수경의 아들은 할머니가 언제 가시는지 물었다. 오히려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손주에게 살갑지 않고 오직 아들을 볼 때만 사랑이 가득한 분위기를 아이도 아는 것 같았다.


곁에서 지켜보니 시어머니는 아픈 것 같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일어났고, 음식을 많이 드셨으며 티브이를 보는 것을 즐겼다. 일일 연속극을 보면 유튜브 할머니들처럼 배우 욕을 했다. 몇 살 어린 친정 엄마보다 더 활기차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수경은 코 앞에서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늦어버린 각성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그날 이후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가셨어?” 이렇게 질문하면 싸울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예상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티브이 속 부부 관계 예능에서 빠지지 않던 단골 대화가 지금 우리 집에 흐르고 있다. 너무 뻔해서 채널을 돌리고 싶다. 처음으로 충성을 저버릴 때가 온 것이다. 이 관계의 끝은 결국 자신이 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물던가 버리던가. 

작가의 이전글 부모 이혼 추진위원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