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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레 Apr 04. 2024

만나러 갈게

보자는 말보다 만나자는 말이 좋다고 너는 말했다. 약속을 잡은 몇 개월 전부터 할머니처럼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두었다고. 우리가 잘 곳은 넓은 비즈니스호텔에 침대가 세 개인 방이라고 예약 문자를 보내왔다. 약속은 3월인데 1월부터 기다리는 너의 마음이 소풍날 아침의 김밥처럼 따뜻하다. KTX를 기다리는 역에서 놀란 것은, 옛날의 기차처럼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시간이 되면 바로 출발해 버리는 것이다. 기차역은 낭만이 사라 진지 오래다.


혼자 가는 여행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먼 나이다. 덩치가 큰 남자가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코를 골고 앉아있다. 어깨를 조금 접어 옆에 앉아 책을 잠깐 읽으려 했는데, 노안이 온 것을 잊었다.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덮어 두고 스마트폰을 본다. 대전 역에서 남자가 내리고 20대 초반의 여자가 앉는다. 익숙한 듯 의자 뒤의 콘센트를 찾아 핸드폰을 충전한다. ‘오. 거기에 콘센트가 있었군!’ 맨 뒷자리의 특권인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타자마자 화장을 시작해 내릴 때까지 속눈썹을 올리던 그녀는 완벽한 메이크업으로 대구역에 내렸다. 열정을 다해 메이크업을 한 적이 언제였더라.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피어오르는 기미를 가릴 뿐인 초 간편 화장을 한 얼굴이 유리창을 비춘다.


밀양을 지나 내릴 시간을 알리는 톡을 보내자 친구는 벌써 역에 나와 있다고 했다. 기다리는 것마저 기쁨인 사람처럼 사람들이 나오는 입구에 서있을 것이다. 창원 중앙역에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곳이다. 타기 전에는 겨울인데, 내리자마자 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가방에 넣었다. 진달래와 산수유 꽃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계절을  빠르게 지나 봄을 만나러 온 것처럼, 나와 봄 같은 시절을 보낸 너를 만나러.


마스크를 썼으나 우리는 한 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봄바람보다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어깨를 토닥이고, 6년 만에 만났지만 어제 만난 사이 같은 약간의 무심함과 다정함이 섞여 있었다. 함께 택시를 타고 카페 거리에 내려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오래된 메타세쿼이아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가로수 길은 여름에 더 예쁘다고 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름에 덥지 않다고, 친구는 다음 계절에도 보고 싶다는 말을 돌려 말했다. 속에 있는 말을 잘 꺼내 놓는 나에 비해 조심스러운 너의 말들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건빵 속의 별 사탕을 찾는 것처럼 즐겁다.


동네의 카페들은 각자의 매력을 발산하는 인테리어로 무장했다.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온 것처럼 가게마다 웃음이 넘쳤다. 인기 있는 가게를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는 성격이라, 그 화려함 속에 옛사람이랑 있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 같았다. 식사를 디저트처럼 먹었고, 카페를 두 군데 찾아 목이 쉬도록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의 곁에 있어야 하는 시기가 오기 마련이고, 그녀는 엄마의 고향으로 언니와 함께 내려왔다. 세 여자와 고양이 한 마리가 사는 집은 매일 투닥거린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마음속 대문을 걸어둔 채 서로의 쪽문으로 드나드는 대화로 살아간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는 사람이라 듣고만 있었다. 친구의 부모님을 뵌 적은 없지만 너를 닮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스며들었다.


해가 지고 숙소에 와인을 사 들고 왔다. “혼자 먹기에는 조금 비싼 가격인데, 함께라서 살 수 있어 좋아.” 나는 왜 그 말에 콧등이 시큰해졌는지 모르겠다. 그리움마저 친구가 되어버린 너의 이야기를 밤 새 듣고 싶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체력을 인정하고 잠을 잤다. 오래도록 기억될 날, 봄날의 따뜻함으로 만나 와인의 시큰함으로 너와의 추억을 더한다. 조금 더 커진 그리움이 남겠지만 우리는 또 다른 계절에 또 만날 거니까. 그런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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