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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레 Oct 01. 2024

일일시호일

똑같은 날은 없다

열 살의 노리코는 부모님을 따라 펠리니 감독의 <길>이라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다. 뭐가 좋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스무 살, 대학 시절에 평생을 걸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찾을 수 없었다. 취업을 시작한 친구들과의 비교, 나는 왜 이럴까 생각되는 날들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엄마의 추천으로 사촌 미치코와 함께 다도 교실에 가게 되었다. 찻수건을 접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차가 나오기 전 다과를 먼저 먹는 것. 차를 다 마셨을 때 호로록 소리를 내어 잘 마셨다는 표시를 하는 것. 차를 내는 기본 동작들의 의미를 알 수 없다. 다케다 선생님은 “차는 형식이 먼저예요. 처음에 형태를 잡고 거기에 마음을 담는 거죠.”라고 알려준다.



무거운 건 가볍게, 가벼운 건 무거운 듯이 들어야 한다. 배우기보다 익숙해져야 한다. 반복이 중요하다. 하다 보면 손이 저절로 움직이다. 선생님의 가르침들이 귀에는 들리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 버벅댄다. 이제 조금 적응이 되었다 생각했을 때, 계절이 바뀌었다. 화로가 나왔으니 지금껏 배운 여름 방식을 잊고 겨울 방식으로 감각을 바꿔야 한다. 겨우 재미있어졌는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림당하는 기분이다. 그 무렵 <길>이라는 영화를 다시 봤더니 굉장한 영화로 느껴졌다. 어릴 때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다도가 네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이곳을 떠나면서 미치코가 물었지만, 다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청개구리 같은 대답을 해 본다.



“매화향이 온 천지에 퍼진다”, “대나무 잎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청풍이 가을을 부른다”. 다도 교실에 있는 족자들은 매번 바뀐다. 족자는 계절이나 시기에 따라 벽에 걸어두는 글이다. 머리로 읽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그림처럼 읽으니 다르게 다가온다. 어느 날 그녀는 미세한 소리의 차이를 느낀다. 더운 물의 뭉근한 소리, 찬물의 경쾌한 소리. 장맛비 소리와 가을비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물소리가 몸과 마음에 스며든다. 이따금 오래된 감정이 살아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노리코의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어 가고 있다.



“같은 사람들이 여러 번 차를 마셔도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아요. ‘생애 단 한 번이다.’ 생각하고 임해 주세요. “ 다회에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남는다. “옛날에는 어제 멀쩡했던 친구가 오늘 죽는 일이 빈번하지 않았을까. 비행기나 전철, 전화도 없던 때였고. 일단 헤어지면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으니.” 선배와 함께 의미를 생각하자 교실에 걸려있던 ‘일일시호일’의 뜻이 다르게 전해져 온다. 매일매일이 좋은 날.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살아있다면 좋은 날일 것이다. 비 오는 날엔 빗소리를 듣는다. 오감을 동원해 그 순간을 맛본다. 눈 오는 날에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어느 해 입춘, 제일 추울 때 피는 꽃 ‘풍년화’가 정원에 피었다. 겨울에 피는 꽃도 있구나. 가장 추운 날이 입춘인 건, 옛사람들이 곧 봄이 온다고 생각하며 독한 겨울을 극복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노리코는 조금씩 숨을 고르며 겨울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영화 <일일시호일>은 주인공 노리코가 24년간 다도를 통해 인생을 배워가는 이야기다. 모리시타 노리코가 쓴 동명의 자전 에세이가 원작이자, 배우 키키키린의 유작이다. 주인공이 <길>이라는 영화를 본 것처럼 나 또한 이 영화를 예전에 봤는데, 넷플릭스에 올라와 반가운 마음에 한번 더 보았다.



처음 제목을 보고 ‘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글자로 읽지 않고 마음으로 읽으면 단어의 뜻이 다르게 느껴진 다는 것을 영화를 보고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매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에게 모두 선물하고 싶은 날들이 아닐까. 서로가 무사함을 고마워하며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고, 더위를 이겨내고 추위를 버텨낸다. 그러면 어느새 마음속에 새싹이 움튼다. 다시 봐도 편안해지는 작품이다. 따뜻한 찻물에 서서히 스며든다. 영화가 전하는 소리와 글, 대사를 만나면 다 괜찮아질 것 같은 희망이 생긴다.



“다도는 예술이자 철학, 삶의 미학이며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고 계절을 맛보는 시간이다. 타인을 대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작은 다실에서 잠깐동안 속세를 벗어나는 ‘작은 출가’라고도 할 수 있다. “ 원작자가 말하는 다도에 대한 의미를 찾고 나니  살면서 한 번쯤 나만의 작은 다실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꼭 차가 아니더라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오감을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건 지나가도록 두면 된다. 그러나 금세 알 수 없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조금씩 깨달아 간다.” 속도와 효율을 강조하는 세상에서는 감각이 둔해진다. 오래 걸리는 일을 빨리 처리하려다 탈이 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영화를 찾아볼 것 같다. 모두의 마음에 사계절이 존재한다. 꽃은 한꺼번에 피고 지지 않는다. 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마음이 춥다면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거쳐 조금씩 싹을 피워내도 괜찮다. 당신의 매일도 좋은 날이길. 멀리서 따뜻한 차를 끓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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